처사문화류공휘흥주지 묘 (處士文化柳公諱興澍之墓)
譯文
가헌문화류공휘흥주묘갈명병서 (稼軒文化柳公諱興澍墓碣銘并序)
공(公)의 휘(諱)는 흥주(興澍)이고 자는 치중(致重)이며 호는 가헌(稼軒)이고 성은 류(柳)씨인데, 그 선세의 계통은 문화 (文化)에서 나왔다, 시조이신 휘 차달(車達)께서는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대승공(大丞公)이고, 휘 공권(公權)이 계셨는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 大夫)로서 시호(諡號)는 문간공(文簡公)이며, 휘 택(澤)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휘 량(亮)은 우의정(右議政)으로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이며 시호는 충경 (忠景公)인데 十五代祖가 된다. 휘 희상(希祥)께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와룡산(臥龍山) 밑 여호리(驪湖里)로 이주 하셨는데 이로부터 후손이 세거하였다 ,고조의 휘는 태제(泰堤)이고 증조의 휘는 노원(魯元)이며, 조의 휘는 형배(亨培), 고의 휘는 임수(琳秀)이며, 비(妣)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공께서는 무오(戊午年 1918년) 四월 十一일 출생하였는데 천부의 자질이 깨끗하였고 풍채와 거동이 호연(浩然)하였으며, 마음을 가다듬어 성품을 수양하였고 몸가집을 순박하고 검약하게 하시었다. 일찍이 학숙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지헤와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덕(德)으로써 몸을 빛나게 하고 글로써 훌륭한 문장을 이루었으며, 집을 다스림에는 화목하게 하고 사람을 대접함에는 너그럽게 하였다. 강호(江湖:강과 호수, 시골)에 낙을 붙이어 세상의 영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천석(泉石: 샘과 돌, 산수의 경치)을 즐기면서 뜻을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지녀 몸을 편안하게 하고 분수를 지키었기에, 어진 명성의 자자함이 향당(鄕無)에 끊임없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공께서 행하신 일은 지금의 세상에서 또한 드문 것이다.
아, 계축(癸丑:一九一三) 12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은 56(五十六)세이고, 원근의 인사들이 애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칠곡 전리(漆谷田里) 선영 밑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김녕김씨 규연(金寧金氏 奎淵)의 따님인데 정숙하고 온순·인자한 부덕을 갖추어 부군을 지성으로 받들었으며, 갑인(甲寅)2월 25일생이고 계축(癸丑) 11월 27일 돌아가셨으며, 묘는 건위(乾位:夫君)의 묘 왼편에 합폄(合窆)으로 모셨다. 공께서는 一남三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기하(基河)이고, 장녀는 노용극(魯容)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김석근(金錫根)에 시집갔고 다음은 손성해(孫聲海)에게 시집갔다. 기하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인탁(寅卓)이고 다음은 인심(寅淳)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훌륭한 손자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가문의 전통과 법도를 잘 닦고, 후인(後人)이 계를 닦아 추모하여 잊지 않으니 공께서 끼친 음덕이 영세토록 장춘(長春)으로 이어지리라. 공께서는 곧 우리 집안의 어른으로서 평소에 존경하고 앙모(仰慕)한 나머지, 공의 서군(嘴君) 손성해씨가 나에게 와서 묘비문을 부탁하기에 명(銘)으로 이른다.
생전에 덕을 닦아 사후에 영광일다. 여러 선비 추모하니 백세토록 향기 남네. 산수 맑고 땅 좋은데 무덤 있어 집과 같다.
돌에 새겨 실었으니 영원토록 밝혀주리,
단기 4308(四千三百八)년 을묘(乙卯. 1975년) 八월 일 문화 류근수(文化 柳根守) 삼가 지음
주손 인탁 (胄孫 寅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