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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문화류공휘동환묘갈명병서(處士文化柳公諱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12 11:05:27       조회수 : 779 파일 :

 

 

 

*묘비명*

 

 

처사문화류공휘동환묘갈명병서

(處士文化柳公諱東煥墓碣銘竝序)


 

 

(譯文) 

 


공(公)의 휘(譯)는 동환(東煥)이고 자는 치삼(政三)이며 류(柳)씨인데 그 선세(先世)는문화인(文化人)이고 조선 태종조(太宗朝)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충경공(忠景公) 휘(諱) 량(亮)의 후손이다. 이로부터 5대 후 휘(諱) 희상(希祥)께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처음으로 대구의 와룡산중(臥龍山中)에 우거 하셨는데 공에게 十세조가 되신다. 증조의 휘는 용원(庸元)이고 고조의 휘(諱)는 성배(聖培)이며 고위의 휘는 진수(鎭秀)이고 비위(妣位)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공께서는 가난한 농가의 장자로 출생하셨는데, 나이 21세에 수원 백씨 규병(水原白氏圭秉)의 따님에게 장가드셨다. 부부가 함께 부지런히 일함을 저버리지 않음에 가도(家道: 집안의 경제, 가계(家計))가 차츰 윤산(潤産)되었는데, 부친의 뜻에 좇아 가옥과 전토(田土)를 모두 아우에게 넘겨 주고 자신의 몫은 달리하면서도 이에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태연하셨다. 때때로 술과 고기를 거르지 않고 어버이께 받들어 드렸으며, 더욱 농사일에 힘쓰고 모든 힘든 일을 두루다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상업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서는 뜻을 끊고 행하지 않았지만, 몇 해 지나지 아니하여 마을안의 기름진 전답은 거의 소유하게 되었다.

이 후로부터는 항상 의관(衣冠)을 갖추어 차리시고 종당(宗堂)에 노니셨는데 종중의 기강이 해이(解弛)해짐을 보면 스스로 일을 맡아 정리하였고, 동리(洞里)의 일이 퇴패해지면 사람을 시켜 지휘함으로써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문중의 작은 종가(小宗)에서 제례의식(祭儀)을 이룰 수 없으면 매양 제물을 내려 주어 제수 차림을 도와 주었다.

두 아우가 학업도 이루지 못하고 생업의 도리에도 소홀하여 달리 살아가기가 어려우므로, 함께 밥지어 먹으면서 같이 살림하기로 하고 여러 조카의 혼사에는 모두 그 비용을 충당하였다. 집에서 부리는 고용인까지도 해가 바뀌었다고 하여 나가게 하지 않고 계속하여 그대로 썼으며, 족친간에 소원해지는 일이 있으면, 구하면 반드시 얻고 바라면 돌아온다는 심정으로 미리 형편을 살피어 꾸어준 일이 매우 많지만, 평생동안 재물로써 다투는 일은 볼 수 없었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몹시 슬퍼하심이 예에 지나칠 정도였으며, 장례를 지낸 후에는 묘소에 나아가 매양 몸소 흙을 져다가 가토(加土)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그만하라고 하면 「삼년 내에는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년에 비로소 서울의 과거 시험을 보러 가셨는데 많은 선비를 보고서 달려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먼곳의 사람으로서 왕도(王都:서울)의 법도를 보았다. 어찌 반드시 차용증서를 주고받아야 하는가』하시면서, 남은 노자를 동행(同行)에게 주고서 호연(浩然 : 태연한 모습)히 돌아오셨다. 이와 같은 것이 공의 일생 동안 이룬 일과 행하신 바의 대강인 것이다.

정유(丁酉:一八九七) 五월 二十四일 병환 중에 계시었고 그 때 모부인(母夫人:모친)께서도 계셨는데, 여러 아우들이 재물의 출입 관계를 물음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끝내 마지막의 효도를 할 수 없으니 이것이 한이다』 하시고, 여타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아니하셨다. 이날 돌아가셨는데 갑진년(甲辰年一八四四)에 출생하였으니 향년은 五十四세이다. 처음에 달성군 서쪽 달천(達川) 위쪽에 장사지냈다가 계축년(癸丑年) 9월에 사는 곳의 안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개장하였다. 부인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이 있겠지만 상세하지 아니하다.

두 아들이 있는데 기춘(基春)과 기욱(基都)이며, 기춘의 아들은 인복(寅復)과인각(寅慤)이고, 딸은 각각 최종인(崔鐘仁)·정지수(鄭之緩)·도유환(都有煥)에게 출가하였다. 기욱의 아들은 인목(寅穆)과 인석(寅錫)이고 딸은 어리다.

아, 나는 기춘·기욱과 더불어 좋은 사이로 사귄 것이 또한 사십 년에 이르고 공에 대하여 세상에 드러난 소문으로 자세히 아는 처지이다. 공께서는 외모가 단아(端雅)하였고 언어는 한묵(罕默 말이 적고 태도가 중후함.默重)하였으며, 안으로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아니하였고, 어려운 때를 만나기도 하였으나 곤궁한 뒤에 성취(成就)하셨는데 부인의 도움을 얻었으며 생업(生業)을 크게 일으킴에 있어서도 부인의 힘이 이바지한 바 적지 않은 것이다. 명(銘)으로 이른다.

와룡산 그윽한데 송백이 우거진 곳

넉자 높이 우뚝한 봉 착한 사람 궁일러니

덕 반드시 안 외로워 어진 부인 도왔더라.

나의 명(銘) 안 부끄러워 진실 써서 남기도다.



창녕 조병선(昌寧 曺秉善)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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