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방
수원백씨묘표(孺人水原白氏墓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12 12:04:36       조회수 : 745 파일 :

 

 

 


유인 수원백씨 묘표

(孺人水原白씨 墓表)

 

 

 

譯文

 

오호라 불초가 선인께는 이미 말씀을 얻어 묘비를 세웠으나 선비께서 이루신 적고 많은 덕업은 다 싣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글이 없음으로써 끋내 사라져 없어지게 하겠는가. 모 부인께서는 수원백씨인데 상조이신 신라의 대사도 우경공 이후로 높은 벼슬이 대대로 서로 이어 전해졌다. 고위(考位)의 휘는 규병(圭秉)인데 일찍 돌아가셨고 비위(妣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부인께서는 병오년(丙午年: 一八四六) 五월 十一일생이다. 총명이 비범하였으니 깊은 밤에 바깥의 신발 소리를 듣고서도 능히 누구인가를 알았으며 누가 잠자는 침실에 들어와서 한 번 불러 물으면 문득 이에 응답하였다. 나이 19세에 부군(府君)께로 시집오셨는데 부부간의 덕이 합치었으며, 또한 시부모의 환심을 얻으셨다. 초년에는 조금의 재산도 축적된 것이 없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길쌈의 일로 잠잘 겨를이 거의 없었으며, 음식을 대하여도 가며 한 술, 오며 한 술 일을 하면서 식사를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도(家道:生計)는 날로 나아지게 되었다.

사람과 더불어 기물(器物)을 잡아 나를 때는 그 사람이 앞서 인도하여 놓게 함으로써 기울어져 떨어지는 걱정을 없게 하였고 부엌에 들어가 불을 땔 때는 매양 일어나 소지하고 맑은 물로 떨어 깨끗이 씻음으로써 함께 뒤섞이는 일이 없게 하였다. 기물을 놓아 둘 때는 그 쓰임에 따라 일정한 곳에 있게 하였으며, 남에게 일을 시킬 때는 반드시 두번 명하는 번거로움이 없게 하고 겸양하는 마음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그것은 품목별로 간수하였으며 시아버님 봉양의 일 이외에도 불시의 일에 변통해 쓰거나 여러 가지 번거로움에 모두 보충할 수 있게 대비하여 집 안의 병속에 넣거나 옹기 안에 쌓아 각각 알맞은 곳에 두었다. 의복은 스스로 베틀의 길쌈에서 나오지만 항상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이 있으므로 미리 갖추어 두어 걱정이 없게 하였고, 아침·저녁 찾아 써도 언제든지 미리 넉넉하게 간수해 두셨다.

닭과 개를 내몰아 쫓아도 거지에게는 물건을 던져 주지 아니하고 탄식하지도 아니하셨다. 마당에 버려진 곡식은 반드시 주워 모아 백금(百金)처럼 쓰셨지만,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쓰셨다. 당시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우면 손수 힘든 일을 맡아 하시고 말씀으로 지휘하심에 하나의 버려진 구석이 없게 하시니, 뭇 사람이 모두 기쁘게 여기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와서 물었으며, 부인께서도 또한 사양하지 않고 좋게 판단하여 말씀해 주셨다. 부군의 상을 당하여서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으시고 집안 일을 이어 다스림이 한결같이 평소와 같으셨다. 친정이 매우 조락( 뒤섞임, 여기서는 의 뜻)하였기에 불초가 봉사(本祀: 제사를 모심)를 청하였더니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이미 후손이 있는데 외손의 봉사가 어찌의리에 맞겠는가』하시면서 매양 친기(親忌)를 맞이하면 슬픈 기색을 드러낼 뿐 이셨다. 을축년(乙丑年) 늦여름부터 뜻하지 않게 기력이 점점 쇠진하였으나 정신은 흐트러지지 아니 하셨는데, 하루는 손을 들어 자손에게 보이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열 손가락이 추위에 얼어 터졌다. 너희들도 많이 추위에 얼고 굶주리게 하였을 것이다.』고 하셨다. 불초 약을 드렸더니 물리치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평생 약을 복용하지 아니하였는데, 죽음에 다달아 살기를 바라겠는가 하셨다. 이듬해 2월 29일 운명하셨는데 향년은 81세이며 예월(禮月: 사후 한 달만의 장례)을 써서 장례를 모셨고 묘는 부군의 묘 왼쪽에 붙여 드리었다. 오호라, 슬프도다.

정축년(丁丑年:一九三七)十一월  일 

불효자 기춘(基春)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씀

 

리스트
댓글 0

처사문화류공 휘 인희 묘갈명(處士文化柳公諱寅羲墓碣銘)
처사문화류공휘동환묘갈명병서(處士文化柳公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