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헌선생 현창비(稼軒先生文化柳公顯彰碑) |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7-17 11:58:48 조회수 : 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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稼軒先生 文化柳公 顯彰碑
先生任의 諱는 興澍이시고 初諱는 東燁이며 字는 致重이요 號는 稼軒이시다. 文化柳氏의 裔孫으로 始祖 大丞公 諱 車達의 29世이며 朝鮮太宗朝의 右議政이신 文城府院君 諡 忠景公 諱 亮의 15代孫이고 驪湖 入鄕祖 諱 希祥의 10代孫이시다. 考位 諱 琳秀와 妣位 密陽朴氏의 長男으로 歲 戊午(1898년) 4月 11日 故鄕에서 태어나셨다. 配位는 金寧金氏 奎淵의 따님으로 天性이 溫恭貞淑하고 婦德이 兼備하사 內助가 圓滿하셨고 享年 60으로 癸丑 11月 27日에 卒하심에 墓는 漆谷 谷田洞 先塋下의 亥坐之原이다. 歲 癸丑(1913년) 12月 18日은 우리들에게는 靑天霹靂과도 같은 날로서 先生任께서 弟子들에게 講學하시다가 冊을 잡으신체로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니 아마도 甚한 過勞와 內喪의 衝擊으로 因하심인 듯! 嗚呼痛哉로다! 將次 해야하실 일들이 泰山 같은데 뜻밖에 棄世하셨으니 어이할꼬! 遠近人士들 모두가 哀悼하지 않는 이 없었다. 墓는 坤位와 合袝하다. 膝下에 一男三女를 두셨으니 男 基河는 娶于 丹陽禹氏 定鉉女하고 女는 江華 魯容極과 金海 金錫根및 密陽 孫聲海에게 各 出嫁하고 胄孫은 寅卓이요 次孫은 寅尋이다. 其餘는不錄한다. 譜와 先生任 墓碑銘에 依하면 天賦의 資質이 깨끗하셨고 風彩와 擧動이 浩然하셨으며 마음을 가다듬어 性品을 修養하셨고 儀容을 淳朴하고 儉約하게 하시었다. 幼時부터 글방에 나아가 修學하셨는데 卓然不群으로 智慧와 才器가 非凡하시고 超邁하셔서 모두의 重望으로 羨望하는 바였고 德으로써 몸을 빛나게 하시고 글로써 훌륭한 文章을 이루셨고 特히 駢儷文에 精通하셔서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셨다. 接人하심에는 寬厚하셨으며 世門의 榮華를 貧치 않으시고 自然에 樂을 부치시니 樂山樂水로 山水를 즐기시며 뜻을 泰然自若하게 지녀 몸을 便安케 하시고 分數를 지키셨기에 어진 선비의 名聲이 藉藉함 이라고 하였다. 또 鄕父老의 傳하심에 依하면 德器를 早成하여 人望이 두터우셨고 氣字가 宏深하고 豊彩가 重嚴하셨으며 儒家의 氣風으로 倫綱을 强調하시고 崇祖尙門하심으로써 羹墻의 뜻을 다졌으며 內行이 敦篤하시고 昏定晨省의 孝로써 事親하시며 友于를 다하시고 일찍 부터 殫誠宗事로 門內를 先導하셨고 平時는 寡默하시고 每事에 凝重하셔서 頎然長者 다우셨음에 鄕堂이 歆羨하였다 고 했으며 本鄕이 奧地 마을이라 落後性을 免치 못하고 있는 바 故鄕의 發展과 後進의 敎育을 爲해서는 人性을 涵養하는 斅授의 一念으로 親히 學墪을 開設하시고 不售로도 熱과 誠으로 講學하시니 높으신 文望으로 門下로 찾아드는 門生들이 鄕內뿐만 아니라 遠近到處에서 數많은 門徒들이 雲集한 바 그 輩出된 弟子들 中에는 뒷날 社會的으로 著名한 人士도 많았다고 한다. 또 安東의 豊柳儒林들과도 維帶交流 함으로써 우리의 門勢를 떨치고 本鄕驪湖도널리알려 門戶를 闡揚하는 契期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 故莊의 對外的인 位相과 名聲이 크게 伸張되고 宣揚되어 他의 부러움을 받았음은 오로지 先生任의 高邁하신 선비적인 名望 때문임을 알수있다. 先生任께서는 一生동안 오직 學問探究와 後進斅授에 心血을 다 바치셨고 自然을 消遙하시는 外는 恒時 黌塾에서 講學하셨다고 한다. 先生任께서 下世하신 이듬해인 1914년 陰 4月 初8日 各地域에서 모인 240餘名의 弟子들이 그 遺德을 기리기 爲하여 學禊를 組織하였으니 曰 稼軒公 學禊였다. 이 날에는 先後輩 同門들이 宗堂에 모여 追慕行事로 作詩와 唱律도 하고 敦篤한 情도 나누며 遺德을 기렸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后代들이 이를 承繼하여 本行事를 받아 이어오는 바 우리 后代들은 後學되고 禊員된 보람과 矜持를 갖고 먼저 嚴肅하고 敬虔하게 追慕儀式을 올린 後 先人들의 뜻을 쫒아 禊員相互間의 情을 敦篤히 다지는 時間을 갖는다. 本學禊의 組織歷史가 오랜 歲月인데도 잘 運營되어 옴으로써 우리 地域 情緖에 옳게 奇與하고 있음은 先生任의 陰德의 所以이리라! 先生任께옵서는 우리 故莊과 門中을 爲한 數많은 勞力과 精誠드린바 行誼와 懿蹟들이 많았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오랜 歲月과 變亂탓으로 文獻들이 거의 散失되고 傳하지 못하니 加惜이로다! 先生任의 撰으로 唯一하게 傳해오는 "處士公事實"에서 斅示하시기를 祖上의 事蹟은 誇張치 말아야 한다는 깊은 뜻을 담으셨고 또 驪湖齋에 掛存中인 驪湖齋舍記에 依하면 年34歲때인 辛卯(1891年) 7月 장마철인데 不拘하시고 머나먼 곳 安東까지 親히 가셔서 前任 大司諫 芝山 柳芝榮公으로 부터 同記文을 받아오셨음을 알수있는 바 宗中을 爲한 丹心이 아니시면 雨中 遠距里의 極甚한 苦楚를 어찌 勘耐하셨으리오! 그러나 千萬多行인 것은 오랜 傳統의 本學禊 會議錄및 諸般記錄書綴들이 바로 先生任의 遺德을 證憑하는 文徵이라할 것이다. 先生任께서 年56歲로 下世하신지 於焉 世紀가 가까워지는 于今까지 鄕內의 어디에도 追慕의 痕跡 하나 없어 欠儀의 責任을 痛感하던 바 이제 늦게나마 그 遺德을 永世토록 기리기 爲하여 뜻있는 분들의 發議와 많은 분들의 淨財獻誠에 힘입어 學禊에서 先生任의 顯彰碑를 謹竪키로 合謀하고 나에게 撰文의 重責을 맡기는 바 適任도 못되고 蕪文이라 辭讓하였으나 모두의 勸에 끝내 辭讓치 못하고 或時라도 累玷이나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나 敢히 猥濫되게도 譜와 鄕父老의 傳하는 말씀들을 選輯하여 右와 如히 叙述하는 바 우리들은 先生任의 德業을 仰慕하며 遺訓을 받들 것을 銘心期約하고 비록 그 懿蹟은 萬의 하나라도 懷述치 못한 옹졸한 글이나 그 徽德은 빛나니 追慕의 情을 刻印한 이 顯彰碑는 永世토록 빛나고 不倫하여 우리의 驪湖도 지키리로다! 우리 모두는 삼가 先生任의 冥福을 비옵나이다. 銘에 이르노니! 學問과 德行이 이미 眞實하셨으니 그 文望, 名聲은 八方으로 드러나셨고! 後進斅授에 온 精誠 솓으시니! 鄕里와 門中을 爲한 큰 業蹟 이루시어 落後된 驪湖의 名譽 살리셨네! 晩時의 恨이 있으나 後學들 뜻모아 先生의 一代記 살펴 碑를 세우고 그 業蹟 잘 알수 있게 顯彰하니! 精魂께서 몰래 降臨하시와 永世토록 이 곳 驪湖 지키시오리!
歲 任午(2002年) 4月吉日
從 后孫 斗烈 謹述
稼軒公 學禊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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