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사문화류공휘서원지묘(處士文化柳公諱瑞元之墓) |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7-19 10:51:25 조회수 : 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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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文化柳公諱瑞元之墓
臥龍山 東麓 甲坐之原의 首位자리 4尺의 높다란 雙墳은 나의 6代祖이신 處士公 諱 瑞元 內外분의 軆魄을 뫼신 兆域이다. 公은 文化柳氏의 后裔로 宗祖이신 高麗 大丞公 諱 車達 以後로 文獻이 爀世하고 簪纓이 相承하여 名卿碩輔와 鴻儒巨士가 高麗史에 빛났으며 派祖이신 朝鮮太宗廟의 推忠翊戴同德左命功臣 藝文錐文提學議政府右議政 文誠府院郡 諡 忠景公 諱 亮은 公의 12代祖이시고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行通訓大夫 錦山郡守 號 醒谷 諱 約은 公의 10代祖이시며 龍蛇의 亂으로 避于 臥龍山下 驪湖里에 入鄕定着하신 諱 希祥은 7代祖이시고 贈 通政大夫 掌隸院判決事 諱 起祥은 5代祖이시며 祖考는諱 俊弼이시고 考位는 諱 靑先으로 字는 汝玉이며 妣位는 密陽朴氏이다. 生4男1女中 公은 弟2子로 諱는 瑞元이며 字는 瑞重인 바 己卯(1759年) 5月 20日 태어나시어 壽限이 길지 못하시어 在世 겨우 50으로 己巳(1809年) 7月 20日 卒하시니 墓는 大邱 坪里의 晋嶝谷 東麓 甲坐原에 安葬하였다. 配位는 安東權氏 爾稱의 따님으로 戊寅(1758年) 2月 10日生이며 甲申(1824年) 6月 24日 卒하심에 墓는 臥龍山 東麓 甲坐之原이다. 生3男하시니 長 淵培는 漢轍을 生하고 次 昌培는 錫轍과 文轍을 生하다. 孫男 漢轍은 長 震永과 次 震翊및 次 震植과 次 震成을 生하고 孫男 錫으轍은 長 震業과 次 震泰를 生하고 孫男 文轍은 無育으로 養入 震泰하다. 曾孫 震永은 達城徐氏 載珩의 따님을 娶하여 生3男2女하니 長 基寬은 金海許氏 綉의 따님을 娶하고 晋州河氏 旼洪의 따님을 再娶하다. 次 基弼은 仁川蔡氏 根植의 따님을 娶하고 女는 全州 李炳華및 盆城 金重祚에게 出嫁하다. 以下는 繁盛하여 不錄한다. 歲 癸丑(1973年) 봄 公의 墓를 故鄕의 案山으로 緬奉하여 坤位와 雙墳하다. 사람이 世上에 살면서 內行이 敦篤하고 外事가 眞實하면 남어지는 可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 公은 賦性이 寬厚하시고 以孝로 事親하시며 每事에 凝重하시고 才德이 兼備하사 鄕堂이 欽羡하였으며 和睦으로 宗事를 先導하시는 等 德器를 早成하여 動靜이 有節하셨다 고 門父老께서 傳하시는 바 公의 仁厚하신 德으로 應當 門戶를 闡揚하신바가 內外로 行誼와 懿蹟이 많았을 것인데 오랜 歲月과 變亂탓으로 文籍을 散失함에 徵考치 못하니 可惜이요 可歎이라 后孫들의茹恨이 크다. 그러나 繁盛한 后孫들이 비록 크게 顯達하지는 못했으나 저마다 德目을 닦아 儒家의 家風과 典型을 지키며 孝悌로써 家門을 이어오고 地域과 社會에 寄與하며 敦睦도 다 하고있으니 이 어찌 府君께서 쌓으신 蔭德의 所以가 하여 아니리오! 嗚呼라! 府君께서 棄世하신지 어언 二百星霜이 가까워지는 지금에 이르도록 아직 墓處에 顯刻이 없으니 侯孫으로서 不仁을 犯하여 悚懼스럽고 欠儀의 責任을 어찌 免하리오! 이제 늦게나마 庚辰 重九節을 맞아 뜻있는 諸孫들의 發議로 公의 遺德을 千萬世토록 기리기 爲하여 直孫 后孫들의 모임인 一心花樹會의 宗財로 오는 春分節에 墓道石儀 할 것을 合謀하고 나에게 遂道의 글을 請하는 바 適任도 못되며 蕪文이라 辭讓하였으나 때에 내가 醒谷公 宗會의 首任을 맡은 바 모두의 勸함이 懇切하여 더 辭讓치못하고 이에 門內의 傳함을 譔輯하고 先代墓碣과 譜에 根據하여 敢히 옹졸한 글로 右와 如히 略序하는 바 后孫들로 하여금 府君의 徽德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함이로라! 또한 많은 后孫들의 家聲이 赫赫함으로 이 빗돌이 永世토록 護域하오리니! 尊靈께옵서는 依持하와 平히 하옵소서!
歲 辛巳(2001年) 淸明節
六代孫 斗烈 謹撰
一心花樹會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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