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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승 문화류공 차달지묘(高麗大丞文化柳公諱車達之墓)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30 11:27:58       조회수 : 927 파일 :

 

 

고려대승문화류공휘차달지묘(高麗大丞文化柳公諱車達之墓)



역 문(譯文)

 

고려대승류공지묘 1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남쪽으로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정벌할 때에 공께서 수레를 내어 통일의 공(公)을 능히 이루시니 공을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하고 대승(大丞) 벼슬을 내렸는데 돌아가심에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에 장사지냈다.

공은 류씨(柳氏)로 휘는 차달(車達)인데 공훈과 업적 이 혁혁하고후손들이 누리는 경사가 연이어져 고려조로부터 우리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름난 재상(宰相)을 지낸 분이 내외손(內外孫)에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렵다.

묘소에 옛적에 비석이 있었는데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민몰(泯沒)하고 전함이 없으므로 그 지방 사람이 몰래 장사하였거늘, 18대손 관찰사 관(觀察使 灌)이 몰래 쓴 무덤을 파내고,

그 후에 외손(外孫)인 홍감사춘경(洪監司春卿)에게 부탁하여 가정(嘉靖:明 世宗) 22년 계묘(癸卯: 1543) 즉 조선 중종(中宗) 38년에비석을 세워 그 후면에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43년 후 만력(萬曆:明 神宗) 을유(乙酉: 1585)에 18대손 희림(希霖)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가서 성묘(省墓)하고 종인(宗人:同族)으로서 도내(道內)에 수령(守令)으로 있는 이들과 더불어 다른 돌로 바꾸어 세우고 아울러 예전의 글을 다시 새기었다.

이제 지난 을유년이 97년이 되어 비석이 또 헐은지라, 종인 중에가서 성묘하는 이들이 모두 다녀와서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상운(尙運)이 관서(關西: 平安道) 관찰사로 가서 관직에 얽매여 비록성묘는 하지 못했으나 비석을 바꿔 세워 인멸(湮滅)되지 않도록 함은곧 상운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이에 석공(石工)을 모아 돌을 다듬고 전말(顚末: 始終)을 대략 기록하여 후일에 계승(繼承) 하는 이로 하여금  전에 세운 년월(年月)을 알도록 하는 한편 예전 지문(誌文)은 다시 새기지 않는다. 


아아! 공의 높은 공훈과 아름다운 업적은 세상 사람의 이목 (耳目)에 빛나서 천지(天地)로 더불어 함께 무궁할 터이니 한 조각 돌이 어찌 경중(輕重)이 있으리요?

그러나 다니는 사람이 공정하고 지나는 사람이 인사하며 훌륭한 분의 묘소인 줄 알고 우러러 사모 하는 뜻을 부침에 이르러 비석이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무릇 공의 후손된 자는 마땅히 힘쓸 진지!

만력 을유 후 97년 신유 (申酉: 1681: 肅宗7年)8월 15일 세움

 

22代孫 嘉善大夫 平安道 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兩西館餉使
22대손 가선대부 평안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양서관향사

상운 삼가 씀

 

2020년 9월 12일 류대걸 편집,발행

관직, 단, 비석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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