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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처사공사실(入鄕祖處士公事實)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6-23 11:57:23       조회수 : 526 파일 :

 

처사공사실(處士公事實)


                                        驪湖誌에서拔萃


공(公)의 휘(諱)는 희상(希祥)이요 자(字)는 운여(雲汝)이며 성(姓)은 류씨(柳氏)요 관(貫)은 문화(文化)이다. 시조의 휘는 차달(車達)이요 호(號)는 아사(鵝沙)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여 벽상공신에 책록되어 위(位)는 대승(大丞)이었다. 6세를 지나 휘 공권(公權)은 금자광록대부이며 시호(諡號)는 문간공이니 해동명필보에 실려있고 자(字)에 휘 택(澤)은 한림학사 대제학 좌복야이며 자에 휘 경(璥)은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세자사로 시호는 문정공이며 자에 휘 승(陞)은 상호군이며 시호는 정신공이다. 14세에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량(亮)은 우의정이며 문성부원군으로 시호는 충경공이니 공에게 5대조가 되신다. 고조의 휘는 한생(漢生)이니 지평 종부소윤이며 증조의 휘는 약(約)이니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고 성품이 강직하여 기묘년(1519년)에 간당(奸党)들의 모함으로 무주의 금리에 들어가서 옛날 삼려대부가 홀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다가 참소를 당한 것을 사모하여 호를 성곡이라고 하였다. 조(祖)의 휘는 영간(榮幹)이니 대호군이며 고(考)의 휘는 준(浚)이니 재질이 탁월하여 무관에 뜻이 있어 붓을 버리고 무(武)로 돌이켰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며 비(妣)는 밀양박씨 이다. 중종 39년(1544년) 갑진년에 공은 보은 구이목동리의 본가에서 세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은 사환가(仕宦家)에서 백(伯)씨와 중(仲)씨 두분은 벼슬에 나갔으나 홀로 영달(榮達)의 길을 버리고 집에서 독서로 본분을 지키며 50여년을 보내다가 마침 임진왜란을 만나 가족을 거느리고 영(嶺)을 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수성의 와룡산 하 여호에 와서 살게되었다. 산은 금락(錦洛)과 연소(沿泝)의 사이에 있어 바야흐로 전란이 치열한 날에 주민이 적었으나 공은 초야에서 은거하는 몸으로 기꺼이 호구를 편성하여 정리 하다가 병신년 (선조29년,1596년)에 향년 53세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그때에 전란이 끝나지 않고 여호에서 영(嶺)을 넘어 고향까지 200여리의 길에 아들 감정공(監正公)이 고아(孤兒)의 형세로 고향에 돌아가서 장례를 치를 수 없어 팔거현 퇴천면 곡전동 자좌의 둔덕에 안장하였으니 지금 칠곡군의 동쪽 땅이다. 배(配)는 성주이씨이며 묘는 같은 둔덕에 있다. 1남을 길러 전(佃)은 군자감정이며 전(佃)이 3남을 출생하여 장남은 기상(起相)이니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이며 다음은 기중(起中)과 기운(起運이고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슬프다. 공의 참다운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당시 사군자의 칭찬한 저술이 본래 있었으나 여러차례 병화를 격고나서 유적이 모두 없어졌으니 못난 자손들의 피눈물 나는 유한(遺恨)이 이미 누대(累代)를 지났으나 다시고정할 문헌이 없으니 운수가 그런가 보다.가만히 생각컨데 세상에서 그 조상의 사적을 들어내서 밝히고저 하는 사람이 실상을 들어서 말하는데 노력하지 않고 쓸데없이 글로만 미화시켜 남의 이목에 빛나게 하니 그것을 가히 영현(榮顯)이라고 하겠느냐? 불초한 우리들은 이런것을 두려워 하여 간략하게 상계(上系)와 부군(府君)의 상난(喪難)의액난(厄難)을 격은 전말만 서술하여 사필(史筆)을 잡을 군자가 어떻게 채택할지 기다린다. 


후손 흥주(興澍)는 피눈물로 삼가 씀 (대승공 29세,가헌공)


註) 휘(諱) 흥주공(興澍公)은 택호 노동 할아버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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