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文化柳氏) 충경공파(忠景公派)소윤공후(少尹公后) 성곡공(醒谷公) 대구종중(大邱宗中) 입향조(入鄕祖)이신 휘(諱) 희상(希祥) 할아버지께서는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 대승공(大丞公) 휘(諱) 차달(車達)의 19세(世)이시고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충경공(忠景公) 휘(諱) 량(亮)의 5대손(代孫)이시고 소윤공(少尹公) 휘(諱) 한생(漢生)의 4대손(代孫)이시며 금산군수(錦山郡守) 성곡공(醒谷公) 휘(諱) 약(約)의 증손(曾孫)이시다.
입향조(入鄕祖)께서는 약 400여년 전(前)에 지금의 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大邱 達成郡 多斯邑 坊川里)에 터전을 잡으셔서 일남(一男)을 생(生) 하시니 증통훈대부(贈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휘(諱) 전(佃)이시다.
군자감정 전(佃)자 할아버지께서는 삼남(三男)을 생(生)하시니 장(長) 휘(諱) 기상(起相)은 증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贈通政大夫 掌隷院判決事)이시고 차(次)는 기중(起中)과 기운(起運)이시다.
이 삼형제(三兄弟)분의 후손(後孫)들이 100여호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번성(繁盛)하였으나 1989년과 2005년경에 대구시 위생매립장으로 수용되어 후손(後孫)들은 눈물을 머금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불행중다행(不幸中多幸)으로 당시 일가친척들께서 고향과 선영들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구시와 협상을 하여 입향조(入鄕祖) 및 여러 선영(先塋)들의 묘소(墓所)와 재실, 여호재(齋室, 驪湖齋)는 한자리에 보존(保存)할 수 있게 되었다. 대구종회 역대 회장(大邱宗會 歷代 會長)님들과 어르신들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정신(精神)으로 입향조 묘소(入鄕祖 墓所)와 재실, 여호재(齋室, 驪湖齋)를 구심점(求心點)으로 대구종회(大邱宗會)를 돈독(敦篤)히 운영(運營)해 온 덕분(德分)에 종원명단(宗員名單)에 등록(登錄)된 남자세대주(男子世帶主)만 500여명이며 보책에 등록된 남자는 약 2,000명으로 추산된다.
묘사(墓祀)때와 총회(總會) 및 각종 행사(各種 行事)때 마다 100~200여명의 종원(宗員)들이 모여 정담(情談)을 나누며 우애(友愛)를 나누고 있다. 1996년부터 매년 봄 선영참배(先塋參拜)를 대형버스 2대로 다녀오기도 하고 2013년부터는 재실, 여호재(齋室 驪湖齋)앞 마당에서 문화한마당 큰잔치 행사와 병행(竝行)하고 있다.
문화한마당 큰잔치 행사 때는 가족동반(家族同伴)으로 며느리들과 어린 아이들도 많이 참석(參席)하여 친척간(親戚間)의 얼굴도 익히고 숨은 재능(才能)을 뽐내기도 하며 효(孝)와 예(禮)를 더욱 도탑게 쌓아가기도 한다. 2017년 7월부터는 대구종중 족보, 파보 편집(大邱宗中 族譜, 派譜 編輯)을 시작하여 2020년 2월에 500부를 출판(出版)하기도 하였다. 수단작업(收單作業)을 하다 보니 후손(後孫)이 번성(繁盛)하여 전국(全國)은 물론이요 세계(世界)로 발전(發展)하여 저마다 터를닦아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자부심(自負心)을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