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공권 선조와 동명이인인 류공권에 관한 고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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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7-07 14:35:14 조회수 : 566 | 파일 : |
柳公權 先祖와 同名異人인 唐代 柳公權에 관한 考察
慕省會 監事(大丞公33世) 柳 志 世
儒州春秋 23輯에서 拔萃
1. 序言
文簡公(휘 公權)께서는 서기 1132년에 태어나셔서 1196년에 政堂文學綜知政事.判禮部事를 끝으로 서기 1196년에 향년 65세를 一期로 他界하셨는 바, 公은 청렴결백하심은 물론 草隸에도 아주 능하셨다.
公께서 御製에 응하셔서 지은 次韻詩와 辭職表가 輿地勝覺과 東文選에 전하고 있고, 海東筆苑과 玄悟國師碑 등의 親筆이 전하고 있는 아주 훌륭하신 우리의 先祖님이시기도 하다.
同名異人인 唐代의 柳公權은 文簡公보다 354년전(778년)에 태어나 唐代에 서예 해서(楷書)에 능했고 865년에 타계하였는 바 해악명언(海嶽名言)에서 唐代 柳公權은 歐陽詢의 글씨를 본받았으나 深遠하지는 못했다는 등의 말도 전하고 있다.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名만 同名異人일 뿐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겨진다.
2. 柳公權(文簡公)
고려 明宗때의 文臣(仁宗10)~(明宗26). 字는 正平, 公께서는 草書와 隸書에 능했으며,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右副承旨에 이르렀다.
左尹公 孝金의 5대손이요 檢校少府少監이신 寵의 아들로 高麗 仁宗11년(1132 壬子)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더니 毅宗9년(1155 乙亥)에 成均試에 급제하고, 이듬해 太學에 들어가 年考와 月講에 항상 우등에 올랐었다.仁宗15년(1160 庚辰)에 文科급제하고, 仁宗16년 (1161 辛巳) 淸州牧書記로 나가 청렴하게 봉직하니 官吏와 백성들이 속이지 못하였다. 3년 후 翼陽府綠事로 옮겼는데그 진퇴와 거동이 항상 법도가 있음으로 王이 公의 충직한 자질이 大臣의 기량이 있음을 알고, 君臣간의 예우가 실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27년(1196 丙辰) 7월에 소의 병세가 더욱 위독함에도 토이 조서를 내려 政堂文學參知政事 · 判禮部事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에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享年65세였다.
이때 士大夫들이 모두 애통해 하여 마지않았고, 王도 또한 슬퍼 마지 않으시며, 文簡公으로 諡號를 내리셨다.
동년(1196 丙辰) 8월 13일(庚申)에 松林郡 西山 南薩(남쪽기슭)에 장례를 모셨으니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의 鍾開川 長坐原의 언덕이다.
부인 孫氏는 대부주부 각(大府注簿珏)의 따님으로 懷道郡君에 封號되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어 아들 彦沈은 同知樞密院事요, 택(澤)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며, 사위는 侍郎 尹威이다.
高麗史列傳에, 柳公權의 字는 正平이요, 儒州人인데 6세조 大丞 車達은 太祖를 도운 공신이었다. 公께서는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초예(草謙)에 능하더니 文科에 등제하여 익양부록사에 기용되었다.
명종 초에 直史館에 있다가 병부랑 중에 옮기고 얼마 후 예빈경으로 金나라에 가서 만수절을 하례하니 金나라 사람들이 그 禮를 안다고 칭송하였다. 右副承旨에 전직되었다가 우산기상시지주사에 승진하여 계사에 칭지함이 많았고, 또한 비익됨이 허다하였다.
同知樞密院事에 올라 明宗25년 (1195 乙卯)에 질병으로 퇴직을 청하니 왕이 그 문학을 사랑하여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이르기를 『조정에 구덕이 있음은 사직의 복이라, 경은 어찌 갑자기 물러나려 하는가 하시었다.
公이 3차례 글을 올리니 드디어 왕이 허락하셨다. 집에서 1년을 병석에 지내는 동안 친속들이 탕약을 올리면, 공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는 것이다하고 끝내 마시지 않았다. 병이 위독함에 이르러 왕이 특별히 政堂文學參知政事를 제수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시니 향년 65세로 文簡公 諡號가 내렸다. 公은 천성이 공평하고 평념하였으며 관직에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公께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安和寺에 가셔서 御製에 응하여 지은 次韻詩와 辭職表가 與地勝覽과 東文選에 전하고 있으며, 친필이 海東筆苑과 龍仁에 있는 光敎山의 瑞峰寺에 소재한 玄梧國師碑에 전하고 있다.
공의 묘소를 수백년 동안 실전하였는데 朝鮮 純宗(1910 庚戌) 5년후 1915년(乙卯여름에, 후손 參奉 秉轍이 公의 墓誌石을 박물관에서 발견하고 전 현감 한정(漢鼎)과함께 출처를 널리 탐색하여 마침내 도굴(盜掘)의 소치임을 확인한 후 관가에 공소(控訴)하여 墓所를 특전하였다.
1916년(丙辰) 3월 1일에 봉축과 동시에 誌石을 매안하고, 동년 8월 13일墓碑를 개수하였는데 墓碑文은 구 墓誌를 참작하여 秘書院丞 寅哲이 지었다. 公의 墓誌가 1922년(壬戌)에 중국인 劉承幹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려 있는데, 그 형태를 이르기를 『지석의 높이는 1척5촌3분이요, 넓이는 2척 7촌 3분이며, 43행으로 1행에 25자, 또는 27자로 같지 않고, 끝에 비어있는 2행은 정자로씌어있다. 고 하였다.
구 墓誌의 銘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족히 도를 관통하고, 사업은 족히 때를 구제했도다.
벼슬은 재상지위에 올랐고, 덕의는 원로로 일컫었다.
임금은 옛일을 생각하여 후에 포상이 후하였도다.
공께서 인도를 다했으니 이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일대의 으뜸가는 스승이요, 만인의 선망이 되었도다.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백성들은 어디를 우러러 볼까.
백세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송백은 푸르고 푸르도다.
이곳은 공의 묘소이니 혹시라도 손상치 말지어다.
6.25 남북 분단이후 省墓를 할 수 없어 60여년간 闕享을 하게 되었다.1993년(癸酉)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溪流里 양지말 1길71에 慕省齋를 새로 짓고 左尹公이신 孝金이하 5代와 文簡公 이하 3代 5位 향사를 올리고 있고, 지난 2003년에慕省齋를 墓省祀로 격상 개칭한 慕省祀에서 2019년부터 始祖 大丞公의 享祀(음 9월15일)도 봉행하고 있다.
3. 文簡公과 同名異人인 唐代 柳公權
同名異人인 唐代의 柳公權은 778년에 태에나서 865년에 타계한 사람으로 우리의先祖이신 文簡公(휘 公權)보다는 354년전의 인물이다.
그는 唐代의 楷書에 능한 서예가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현비탑비(玄碑塔碑) 등 楷書法帖-中 書法家 柳公權 [출처] 楷書法帖-中 書法家 柳公權(병). Liu Gongquan. (웨). Liu Kungch`대체이미지an. 字는성현(誠懸). 중국의 京兆(陝西省 長安일대의 행정지역)에서 태어났고, 官職은 太子少師에 까지 이르렀다.
서예는 楷書에 특히 뛰어났으며 처음에는 王羲之 書體를 배웠고, 당시의 筆法을두루 익혔던 바, 글자체가 힘이 있고 아름다워 書藝분야의 일가를 이루어 당시 벼슬아치의 碑文에 柳公權의 글씨를 쓰지 않으면 불효라고 여겼을 정도였으며, 외국인도 중국에 올 때는 특별비용을 마련해서 柳公權의 글씨를 구입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매우 높았다.
그는 주로 안진경(顔眞卿)을 본받았으며, 구양순(歐陽詢)과 설요(薛曜)에게도 영향을많이 받았다.
顔眞卿의 글씨에 살이 많다면 그의 글씨에는 뼈가 많아서 함께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이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커 `안유(顔柳)`라고 병칭되었다.그의 대표작으로는 玄秘塔碑와 神策軍碑가 있다.
필사본으로는 왕헌지송리 첩발미(王獻之送梨帖跋尾)와 임왕헌지 낙신부(臨王獻之洛神賦)가 세상에 전한다.
그 이후로 楷書에 능한 사람은 있었지만 독자적으로 파를 형성할 만한 인물은 없었기 때문에 楷書는 顔眞卿과 柳公權에게서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을 서로 비교할 경우 柳公權은 顔眞卿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에게 배워야 비교적 수월하게 서도를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송나라 주장문(朱長文)의 『속서단(續書斷)』의 기록에 의하면, 목종 때 그는 夏州의 書記로써 주청을 올렸는데 황제가 이를 보고 “짐이 일찍이 불묘(佛廟)에서 그대의 작품을 보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朕嘗于佛廟見卿眞迹, 思之久矣.” 라고 말하고는 바로 우습유시서학사(右拾遺侍書學士)로 임명했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또한 그를 우사랑중홍문관학사(右司郞中弘文館學士)로 진급시켰다.
柳公權의 서예는 제왕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을 당시에 이미받았다. 한번은 문종과 학사들이 詩句 잇기를 하는데 문종이, “사람들 모두가 더운열기에 괴로워하나 나는 여름날이 길어 좋다(人皆苦炎熱, 我愛夏日長]."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對句를 이었지만 문종은 유독 柳公權의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전각에 서늘함이 일어나네[薰風自南來, 殿閣生餘凉.”라라고 한 것을 칭찬했다.
그리고 글의 뜻이 모두 옳으니 전각의 벽에 쓰라고 명했다. 柳公權은 성지를 받들어 붓을 잡고 한 붓에 써냈다.
글씨의 형체가 매우 커서 약 5촌이 되나 정미함이 아주 뛰어나 문종이 찬탄하며 "종요와 王義之도 이에 더할 수 없도다(鍾王無以尙也].”라고 하며 즉시 그를 소사(少師)로 임명했다.
또 한 번은 선종의 명에 의해 그는 어전에서 해서로 衛夫人傳筆法于王羲之 초서로 `謂語助者,焉乎哉也, 행서로 `永禪師眞草千字文得家法` 등 29字를 씀에 令軍容使인 西門季가 벼루를 받들고 樞密使인 崔巨源에게 붓을 주도록 했다. 다 쓴 뒤에 매우 칭찬을 하며 기물과 돈을 하사했다. 이 일이 널리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배움을 구했다.
그리고 당시 대신의 家門의 碑와 墓誌銘은 그의 글씨가 아니면 자손을 불효라고여겼고 외국에서 조공을 바치려고 올 때도 그의 서명이 씌어진 작품을 받아가서이 顔眞卿이는 柳公權에게 구입한 글씨라고 했다.
心正則筆正은 당나라 서예가 柳公權의 筆諫과 관련 있는 고사이다. 당 목종은 어리석고 우둔한 황제로, 한번은 목종이 柳公權에게 글씨를 쓰는 용필법에 대해 물었다.柳公權은 “마음이 바르면 필법도 바르니 가히 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心正則筆正, 乃可爲法.”라고 대답하니 당 목종은 얼굴을 바로하고 필간임을 깨달았다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柳公權의 서예로 해서는 현비탑비, 행서는 蘭亭詩, 몽조첩(蒙詔帖) 등이 가장 유명하다. 이들 작품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그의書藝는 王義之를 근간으로 한 후에 또한 수. 당의 유명 書藝家의 작품을 섭렵하여이를 융회관통하고 변화를 시도하다가 마지막에 스스로 새로운 뜻을 드러내어 뛰어난 대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은 「뢰석만경문(誄石曼卿文)」에서 “석만경의 筆法은 안진경의 筋과 류공권의 骨이다. "延年之筆, 顔筋柳骨"라고 했다.
이때로부터 `안근유골(顔筋柳骨)`이란 美辭麗句가 생겨 세상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후세에 柳公權의 글씨에 대한 평가도 다른 書藝家들처럼 각자의 견해에 따라 포평을 달리하고 있다.
명나라의 동기창(董其昌)은 柳公權을 높이 받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柳公權의 글씨는 힘써 王義之 筆法을 변화시켜 蘭亭書의 면목과 같게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신묘하고 기이하면서 진부한 것을 변화했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릇 사람이 글씨를 배울 때 자태로 연미함을 취하나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나는 우세남. 저수량. 顔眞卿.歐陽詢의 글씨를 열에 하나 정도 비슷하게 할 수 있다. 柳公權을 배우고부터 비로소 용필의 예스럽고 담담한 곳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는 柳公權의 필법을 버리고 王羲之를 따를 수 없다.
柳尙書極力變右軍法,蓋不欲與帖面目相似,所以神奇化腐朽,故離之耳.凡人學書, 以姿態取媚, 鮮能解此, 余于虞世南褚歐, 皆曾夢十一. 自學柳誠懸方悟用筆古淡處, 自今以往不得舍柳法而右軍也.
그러나 “柳公權은 歐陽詢을 본받았으나 심원함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추하고 괴이하게 쓴 못난 글씨의 종주가 되었다[柳公權師歐陽詢,不及遠甚. 而爲醜怪惡扎之"라고 하면서 필법은 여기서 다 사라졌다고 했다. 이러한 폄하는 전혀 옳지 않고 편파적인 논지임을 면치 못한다는 해악명언(海嶽名言)의 기록도 있다.
4. 맺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의 자료를 통해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의 先祖이신 文簡公(휘公權)과 同名異人인 唐代의 柳公權(778년-865년)과는 태어난 年度 등 여러면에서 다른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일후에 우리 후손들이 만에 하나라도 착오없기를 바라는 측면에서도 검토, 고찰을 해 보았다는 말로 본 論題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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