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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소윤공(少尹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31 10:19:51       조회수 : 489 파일 :



 

 

종부시소윤 류공(漢生)묘비명(墓碑銘)

[번역문]


 

공의 휘(諱)는 한생(漢生)이요, 류씨(柳氏)로서 관향은 문화(文化)니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대승공(大丞公) 휘 차달(車達)의 후예이시다. 증조는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휘 보발(甫發)이요, 조는 증정헌대부 참찬문하 의정부사 문화군 휘 계조(繼祖)요, 선고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시호 충경공(忠景公)휘 량(亮)이며, 선비는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로 공조판서 휘 원발(元發)의 따님인데  조선(朝鮮) 태종(太宗) 임오(壬午 : 一四0二) 정월 二十二일에 공을 한양(漢陽) 본제(本第本家)에서 출생하셨다. 병신(丙申:1416) 4월, 공의 나이 15세 되던 해에 외간(外觀:父親喪)을 당하여 장례를 유감없이 행하고 복(服)을 마치셨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심에 이르러 훈신(勳臣:功臣)의 자제로서 승사랑 공신도 감승에 제수되고, 이어 감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었더니 경술(庚戌: 1430) 9월에 언사(言事)로 파직 되셨다.

갑인(甲寅:1434) 정월에 내간(內報: 母親喪)을 당하여 복(服)을마치고 병진(丙辰: 1436)에 도관정랑에 발탁되어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옮겼더니 곧바로 조봉대부 제용감부정(朝奉大夫 濟用監副正)에 승진하셨다. 신유(辛酉:1441)에 평안도(平安道)에 오래된 옥사(獄事)를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경차관(敬差官)으로 나가서 득실(得:是非)을 가려 처결하고 이듬해 평안도 경력으로 나가셨다.계해(癸亥: 1443)에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고 만기가 차서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으로 옮겼더니 무진(戊辰:1448)년 겨울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승진하셨다. 이듬해 기사(己巳:1449)년 3월에 질병으로 자택에서 졸하니 당시 나이 48세이셨다.동년 12월 13일 양주(楊州) 동촌 마산리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는데 곧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내동 후록이었다.


공께서 절충장군(折衝將軍) 최공 우(崔公 字)의 따님과 결혼하여 6남 2녀를 낳으셨다.

본란(本欄)에 아들과 사위의 관함(官銜)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개서(改書)하니, 아들에 맏이 훈(纁)은 천안군수(天安郡守)요, 다음 륜(綸)은 합천군수(陜川郡守)요, 다음 채(採)는 성주목사(星州牧使)요, 다음 작(綽)은 신천군수(信川郡守)요, 다음 약(約)은 금산군수(錦山郡守)요, 다음 인(絪)은 생원(生員)이며, 따님에 맏이는 부사 변석륜(府使 邊石崙)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찰방 최연령(察訪 崔延齡)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올바르며 분명하고 신중한 한편, 일을 처리함에 민첩하여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훌륭한 명사(名士)로 일컬었고, 관리로서 정사(政事)에 밝아 이르는 곳마다 명성(名聲)을 칭송하였는데 오직 그 수명(壽命)이 길지 못하여 포부를 능히 다 펴지 못한 것이 애석 하다. 그러나 아들과 손자들이 능히 아름다운 유덕(遺德)을 잘이어 그 가풍(家風)을 지키니, 내가 짐짓 그 경사(慶事)의 흐름이 길이 전하여 그치지 않음을 알겠도다.

내가 부끄럽게 인척(姻戚)이 되어 대략 공의 행업(行業)을 알고 있는 바, 이제 그 아들 훈(纁)이 와서 묘명(墓銘)을 청(請)하니 감히 사양(辭讓)하지 못하고 이에 명사(銘辭)에 이르노니, 정승(政丞)의 가문(家門)에 아들이 있어, 지조와 조행(操行)이 순수하였도다.

사물(事物)을 밝게 통달(通達)하고, 남에게 충실(忠實)하고 신의(信義)가 있었도다. 포부(抱負)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어찌 장수(長壽)도 못했는가? 하늘의 뜻이 아득하고 멀어, 능히 알지 못하겠도다.

선(善)을 행(行)하여 보답(報答)이 있으니, 아들 손자로 징험(徵驗)하겠도다.

집현전제학 정창손 찬(集賢殿提學 鄭昌孫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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