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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 관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12 13:01:59       조회수 : 488 파일 :




류-차 관련



2012년 저자 류주환 발행 대호하루(大虎下淚)에서 발췌



이 문제는 문화류씨의 선계문제와 직접 연관되는 것이기에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여기서는 설원기의 신뢰성의 평가에 관계되는 사실들만을 언급한다.

설원기는 류씨와 차씨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설원기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차원부는 적통(嫡統)인데 서얼출신들인 하륜 등이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원부가 상당한 집안 출신임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원부는 확실히 연안차씨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차중규(차효전 10세), 차약송(12세), 차덕위(14세), 차송우(16세), 차득규(17세), 차안도(19세)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로 부족했는지 설원기는 류공권(류차달 7세)과 그의 손자 류경(9세)에 이르러 상당한 문벌을 이룬 문화류씨에 붙였다. 설원기의 본문에서 본론의 시작에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차원부의 소개가 바로 그것이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근자에 차씨 문중에서는 류차달의 성명이 차해(車海)라고 주장하였는데, 우선 대체 설원기의 이 선언적 구절의 어디를 보고 류차달이 차씨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고려시대의 금석문에서까지 밝히고 있는 고려태조 삼한공신 류차달은 이름만 나오고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효전이라는 인물이 모든 정사(正史)에 반해서 홀연히 잘못된 명칭인 대광지백이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고려사』를 집필했던 인물들도 참여하고 『고려사』에 누구보다 정통했을 박팽년이 본문을 썼다는 설원기의 기록으로서는 전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구절이다.

필자는 현재 문화류씨와 연안차씨, 그리고 개성왕씨가 받아들이고 있는 「원파보」는 몇몇 역사적 인물을 끼워 넣어 조작해낸 계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2007년에는 문화류씨대종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공식 선언을 했음.) 설원기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들이 역사와 합치되지 않거나 역사에서 증명할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원기에 나온 차원부의 소개 글을 위시한 류-차의 관계에 대한 묘사들도 모두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설원기에 적혀 있는 류차동원의 주장이나 차씨가 왕씨와 같은 계통이라고 하는 주장들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의 관점은 과연 설원기의 그런 주장들이 설원기가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헌에서 온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우선 설원기에서 주장되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박팽년의 본문에서는 시조인 차효전이 류차달의 맏아들이며 공적을 세워 대광지백(大匡之伯)이 되고 식읍 1000호를 받고, 그 후손들 역시 문벌을 이루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내용을 포함한 족보가 해주(海州) 신광사에 있었는데 하륜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주석에는 차씨 성을 하사한 이우, 차호전이 참언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큰 계통 혹은 신라 본계(本系) 등이 서희(徐熙)의 가사(家史), 혹은 『찬집 여사(撰集餘史)』(『찬집여사가 제목인지 혹은 찬집한 여사`라는 말인지 분명치 않음), 정지상(鄭知常)의 『서경야사(西京野史), 혹은 서경잡기(西京雜記)』(이상 두 사람의 작품은 제목이 혼동되어 나옴), 김방경(金方慶)의 초당일기(草堂日記)』, 그리고 김사형(金士衡), 김균(金稛)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에 나은다고 쓰여 있다. 설원기의 본문에서는 차씨 성을 갖게 된 이야기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차효전에 부여된 호칭인지 관작인지 모호한 `대광지백 이란 단어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이다. 대광은 벼슬 이름이고 백은 관작제도인데, 그 들이 흔합되어 있는 이상한 단어인 것이다. 그리고 식습을 1000호를 받았다는 말은 그 공적이 찬란했고 그 벼슬이 실질적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역시 『차원부설원기, 전체의 문제점과 동일하게 정사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일 따름이다. 더구나 참언 운운하며 그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방어막으로 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그 진위에 대해 더욱 의심이 가게 만든다.

이예장(1406~1456)이 지었다는 시와 주석에서 선계의 내력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주석은 경진본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으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예장은 설원기가 지어졌다는 세조 2년 5월에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다. 따라서 시의 주석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일단 문화류씨 기사보(1689년에 나오고 있고, 역시 후에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쓴 것이라 해도 그 내용은 신중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그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신라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제13대 왕, 재위 262~284) 때의 `승상`이었다고 하는 차제능(車濟能)에서 시작해서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淑)까지, 모두해서 18명의 차씨 계보가 제시되어 있음. 이들 18명 중 14명이 `승상` 이었다고 나옴. 승색과 공숙은 신라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 왕, 재의 809~826;본명 김언승(金彦昇)) 때 그에게 살해당한 전왕(前王: 애장왕)의 원수를 갚고자 하다가 탄로 나서 도망쳐서 이름을 각각 류백(柳栢)과 류숙(柳淑)으로 바꾸었음.

류차달에게는 車達`의 호(號)가 주어졌다고 하며, 그 아들에게 조상의 위대함을 이어가도록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다 함. (경우는 거의 없지만 무리하면 號는 불렸다`라고 해서 이름까지 포함하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지만, 원문에 贈車達之號로 나와 대략 고려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름(名)과 자(字) 이외로 부르는 호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함.)

류차달의 처음 이름(初名)은 해(海)였음. 계보가“공숙-진부-무선- 보림-해 로 이어졌음.


이예장은 자신을 차상도(차원부의 손자)의 처 김씨의 이성(異姓) 5촌 조카라고 밝힘.

이상의 이예장의 주석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라시대에 차씨가 존재했다는 신빙성 있는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차승색의 아버지로 나오는 차건신(車建申)의 경우는 부산 기장 만화리의 무덤 등을 들어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기장의 별칭인 차성(車城)의 차(車)자(字)를 견강부회하여 조작한 이야기임이 밝혀졌다. 더구나 신라시대에 승상이라는 직책은 없었는데, 이것을 후대의 정승(정1품) 정도의 벼슬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생각한다 해도, 차씨가 대대로 최고위 벼슬을 거의 이어왔다는 말이 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어디를 봐도 18명 중에 14명이 그런 벼슬을 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실상 저 두 책에서는 차씨라는 성이 신라시대에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차씨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헌덕왕 때의 일이라는 승색과 공숙의 이야기 역시 정사에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헌덕왕 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고 두번의 반란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승상`이었다고 하는 승색 부자의 암살 기도는 상당히 큰 사건이었을 터인데,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다.

호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고려사』를 검토해 보아도 시호는 자주 주어졌지만 호는 고려 전기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나라에서 `차달`이라는 호를 내렸다는 기록은 후대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문화류씨 문헌에는 `차달`이라는 이름(名)을 받았다는 글(「興栗寺重修樑上所記書」)이 내려오고 있는데 이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설원기의 구절은 아무리해도 이름을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없고, `차달`이 호인데 그것을 후손들이 이름으로 써 왔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하여간 설원기는 `차달`을 호로 설정하고 있으니 그에 따라 초명(初名)을 설정할 필요성이 있어 그것이 `해(海)`였다고 주장하는데, 한둘이 아닌 여러 고려시대 기록이나 금석문에서조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났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임을 말해준다.

이상은 설원기의 기록들을 그 자체로 분석해 본 결과인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친 류차달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더욱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곧 고려 개국공신으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명기된 류차달 자신에 대해서도 그 정체와 활동을 확언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는 판국에 그 맏아들이 고려시대부터 이미 알려진 아버지의 관작이나 공로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글은 전혀 믿을 수 없다. 아무리 여러 변수를 감안해서 넓게 생각해도 차효전이라는 인물은 류차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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