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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씨 주장과 반박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12 13:52:06       조회수 : 543 파일 :

 


연안차씨의 주장과 반박


2012년 발행 류주환 저자 대호하루(大虎下淚)에서 발췌



연안차씨들은 2004년에 발간된 최신 대동보에서 류차동원설에 입각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류색(차승색)에서 ‘류해(대승공)까지 모두 실제로는 차씨인데 류씨를 가칭(假稱)하고 있던 것이라 하며 원 성씨라는 차씨로 밝혀 적고 있다. 대승공 이상은 필자는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뭐라고 언급할 마음이 없지만 대승공은 다름 아닌 문화류씨의 시조이다. 연안차씨들이 남의 시조를 갖다가 성을 갈아버린 결과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주장은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사성이 아니면 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차씨는 신라 태조에게 사성받았고, 차승색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류씨로 변성명하고 살다가 왕건 덕분으로 차씨 성을 다시 찾았으니 차씨 성은 왕권에 의해 보증 받은 진짜 성이고 류씨도 왕건에게 사용을 허락받았으니 그때부터만 진짜 성이다. ② ①에 모든 주장이 다 들어 있어 중복되지만, 또 근거로 언급되는 구절이, 언제 어느 곳에 실린 「원파보」에 들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這間柳氏之冐稱又不可廢也”이다. 곧 여기서 모칭(冒稱, 남의 성을 가칭(假稱)함)이란 말이 명확히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설원기에는 효금에 대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음.)


③ 왕건이 차씨 성을 하사할 때 “承襲上祖之舊姓車氏”라 하여 선조의 옛 성인 차씨를 ‘승습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여기서 승습은 끊임없이 이으라는 뜻이라서 중간의 류씨로 바뀌었던 것들도 모두 차씨로 바꾸라는 뜻도 포함된다. (설원기에는 “承襲上祖弘烈也”로 나옴.)

필자는 위에서 대승공이 고려의 개국공신임을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어떤 자료에서도 대승공보다 더 큰 업적을 세우고 식읍을 천 호까지 받았다는 대승공의 아들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아무데도 없다. 또한 『고려사』에는 간혹 식음을 내려준 기록은 있으나 918년의 개국시의 포상에도 물건들만 내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여러 기록들을 따져 연구한 결과를 보면 60여 명의 공신들 중 식읍을 받았다는 표현은 간혹 쓰이나 실제로 식읍을 받았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안동부를 받은 권행(權幸)이고 나머지 6명은 실질적으로 전(田)을 받았다고 한다(김갑동). 어쨌든 땅을 받은 것은 모두 해야 7건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차효전이라는 인물이 식읍을 받았다는 것은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류차동원설은 그 뿌리부터 부정되며 연안차씨들의 주장에 대답을 하면 사상누각의 논의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만만에 하나, 류-차 동원이 사실이라 가정해도 연안차씨들의 주장은 억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차씨가 그 출처가 무엇인지도 모를 「원파보」의 한 줄 기록외에 신라 태조에게 사성을 받았다는 외적 증거가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차제능과 차승색 역시 실제 존재했으며 정말 핏줄이라는 믿을 만한 외적인 증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차씨는 그래도 「원파보」에 혁거세가 사성했다는 구절이라도 있지만, 왕조명은 스스로 일토(一土)산 아래 산다 하여 왕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왕씨는 사성 받은 적이 없으므로 가짜 성이었는가.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첫째, 사성 관련하여, 사성 받지 않으면 가짜 성이라는 주장을 세상에 내놓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이나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실제 사성의 기록은 많지 않다. 『증보문헌비고」의 `고려` 항목에 나온 내국인에게 사성한 예는 왕씨가 가장 많고, 권씨, 차씨, 짐승의 성 4개, 어씨 등뿐이다. 게다가 이중 지금 필자는 차씨의 사성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는 아마도 지나나 우리나라의 왕족과 연관되는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짜 성이며 그게 지금까지 그렇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류씨 자체에서도 확실한 반박을 할 수 있다. 바로 왕건의 첫째 부인인 류씨 이다. 정주류씨인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며, 왕건에게는 정주류씨 부인이 또 하나가 있는데 첫째 부인이 후사를 보지 못해 같은 일가를 들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만큼 강력한 류씨 집안의 존재를 느끼게 만든다. 이 
정주류씨는 유주(문화)류씨 처럼 사성된 적이 없다. 과연 왕건의 부인이 가짜 성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엔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과 발달에 관해 철저히 무식을 가장하고 사성을 받지 않으면 가짜 성 운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모칭’ 관련하여, 우선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를 명확히 대기를 권하고싶다. 류-차의 관계에 대해 족보에 최초로 기록한 『기사보』의 「원파보」는 설원기를인용하고 있을 따름이며 설원기에는 그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冒其祖父丞相儉夫妻楊姓變柳氏以來也”

(그(승색)의 할아버지 승상 검부의 처 양씨를 모칭(冒稱)하여 성을 류씨로 바꾸어내려온 것이다.)

冐자를 쉽게 본 따서`라는 식으로 해도 되는데 일부러 모칭이란 단어를 사용해서번역해 보았다. 다른 구절들은 이 말을 후대의 기록자들이 나름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설원기는 효금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기사보』「원파록」의 근간 중 하나인 류지원의 글에는 왕건이 “장자 효전을 연안차씨로 차자 효금을 문화류씨로 봉하였다”고 나온다. 이것을 후대 사람들이 마치 왕건이 말한 것처럼꾸며 “這間柳氏之冒稱...” 운운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용상 별차이가 없지만 한문 한 구절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아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하여간 여기서 모칭(冒稱)이라는 말은 가칭(假稱)과 같은 말이라서 임시로 성을칭한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성을 거짓으로 꾸며댄다는 뜻이다. 류차동원설의 관점에서 보면 하등 이상한 단어가 아니다. 원래 차씨였다는 사람들이 위험을 피해 신분을 속여 류씨로 스스로를 칭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이 구절과도연관되어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셋째는 승습이란 단어와 관련한 것이다. 우선 이것도 왕건이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하여간 이것도 위에서처럼내용상으로는 차이는 없다. 여기서 한번 따져 보기로 하자. 차승색이란 사람이 스스로를 류색인지 류환인지 류백인지 모르겠지만 류씨로 바꾸었고 그 아들 차공숙도 류숙(한자는 두 종류)으로 바꾸었다고 하자. 그리고는 숙의 아들 진부에서 고손자 류차달, 그리고 그 아들 류효전과 류효금까지 한 세대를 30년으로 따지면 150년 정도를 류씨로 살아왔다. 그들이 문화로 피한 후 길어야 15년 정도 이내에 자신들의 생명을노리던 헌덕왕이 죽었으며 나중에는 신라 자체도 망했다. 왜 차씨로 돌아가지 않은것인가. 과연 그들이 가짜 성을 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왕건이 150년 이상을써온 성씨의 내력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무슨 생각을 가져 차씨 성을 주며 류씨성은 그대로 씨라, 라고 말했을 것이며, 무슨 악한 마음이 있어서 한 가족의 성을 쪼간단 말인가. 그 가장(家長) 곧 대승공에게 너 수레 잘 만들어 공을 세웠으니 자랑스러운 자씨 싱이 되기라, 했다면 이해가 된다. 사성이란 한 개인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주는 것이기 때문에 족장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었다면만이 된다. 그러면 모두 차씨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윈파보」에 대략 30세 이상 거의 한 줄로 내려온 차씨의 계통에서 과연 차씨가 승색의 세대에서 승색 한 사람에만 존재했었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2000년 통계를 보면 차씨는 전체 18만여 명인데, 그 중 연안차씨가 16만1천여 명으로 대부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문화류씨는 래성(來姓)인데 차씨는 이미 촌락성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연안 지방에 차씨들이 류씨가 유주(문화)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다수 살고 있던 증거가 된다. 대승공 집안의 기반이 문화였는데 대체 어떤 연고로 인해 그 아들이란 사람이 연안을 식읍으로 받았다는 것인가. 식읍의 부분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연안이 언급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효전이 그곳에 연고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봐도 대승공의 아들이 거기 가서 비로소 시작하여 차효전 11세까지 독자로만 이어진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라말여초의 수많은 성씨들이 그러했듯 연안 지방에 살았던 일족이 차씨 성씨를 분정 받으면서 혹은 자칭(自稱)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연 무오공신 제1위의 류경(1211~1289)덕분에 유주지방이 문화현으로 승격되었듯이 연안지방은 역시 무오공신인 차송우(車松祐) 덕분에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된 적이 있었다.

또 백보 양보해서 차씨 성을 류효전에게 내려주면서 “옛날 차씨 성이 위대했으므로 승습하라” 하면서 연안차씨를 봉했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관향과 성이 일체가 되어 하나의 성씨를 이루므로 새로운 성씨을 만들어준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므로 중간에 류씨였건 왕으로서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성을 내려주면서 조상들 성까지 바꾸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왕이건 누구건 간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승습은 학풍 같은 것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백 년 전에 학풍이 끊어졌다가 그것을 다시 살려 이어간다면 역시 승습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물리적으로 해석한다면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이다. 스스로 류씨를 유지해왔고 여전히 류씨인 사람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닌 것이다.

또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설원기의 본론이 시작되는 첫머리가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이라는 선언이다. 여기까지는 그 어떤 해석에 있어서도 류효전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류차달`이란 이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설원기의 어디에 대승공이 차씨라는 말이 있으며 차씨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저 첫머리만 보아도 설원기는 그 배경으로서 문화류씨의 문벌에 기대고 있음은 명확하다. 이것은 또 이 다음 구절을 보면 류차달은 류효전(사성 받기 전)에 비해 겨우 호(號) 하나만 받을 정도의 공만을 세웠고, 류효전은 대체 어떤 공인지 모르겠지만 천 호의 식습을 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다고 나오기때문에 류차달을 아예 빼버리고 차씨만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도 충분한 부분이었다.곧 류몽인의 차식의 신도비에서 실제 그런 것처럼 차라리 별 볼일 없는 아버지를 아예 제외하고 “... 차원부는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효전은...”이라고 말하는 것이백 배 적합한 구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원기는 분명 그러지 않았으며 특히 주석에서 끈질기게 류차동원설에 기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설원기는 그배경으로 류차달의 ‘류`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설원기는 류씨와 차씨를 함께 언급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류차(柳車)로 하고 있다(최소한 가장 오래되었다고 평가되는 필사본 설원기는 그렇다). 설원기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면서 왜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무시를 하고 순전 지엽적인 구절들을, 그것도 2차 3차 후대인들에 의해 뉘앙스가 변하여 표현된 구절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설원기의 다음 구절이다. “其子孝全全字爲生字別賜姓氏....” 물론 앞 구절에서처럼 차효전이라는 이름이 명기되고 있어 별 문제 삼을 일은 아닌 듯하지만, 이곳의 ‘爲는 그 앞에 ‘’과 뒤의 ‘賜`를 보면 마찬가지로 사역의 뜻을 갖고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곧 이렇다면 저 구절의 해석은 “그(류차달의) 아들은 효전인데 全자를 生자로 하게 하였고 별도로 성씨를 내려..."가 된다. 여기서의 내용상 주어는 왕건이다. 이렇다면 왕건이 류효전에게 내린 것은 차씨의 성만이 아니라 차효생이라는 성명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효전을 일명 효생이라고 주석을 단 부분은 있어도 왕이 내린 차효생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기록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의 불찰일까.필자의 관심 밖의 일인데도 이것을 언급한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망각한 자의적인해석과 부정확한 해석이 가져다주는 폐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차제에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초의 족보 문제이다. 설원기에는 차원부가 제작했다는 족보가 언급된다. 실은 서문이나 본문만 보면 차원부가 제작했는지어떤지 명확치는 않다. 그런데 족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승(家乘)이다. 가승 수준의 족보는 고려시대에도 흔히 존재했는데 이것은 집안의 내력을기록한 당시의 묘비명들의 내용만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족보라고 하면 그 체제와 내용에 있어 본격적인 족보로서 인정을 받을 만한 것을 일컫는다.그런 의미의 현존하는 족보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 1477년)와 문화류씨의 『가정보』(嘉靖譜, 1562년)가 시초이고, 현존하지 않지만 추정을 통해 최고의 족보로 인정을 받는 것은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이다. 비록 설원기에 차원부가 만들었다는 족보(나중에는 보판이라고 말이 바뀌지만 설원기는 족보라고만 부르고있다)가 언급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라고 단정할 근거는 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초기에 족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그것이 문화류씨나 안동권씨 족보처럼 인정받을 만한 족보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 체제와 내용이 정확히 어땠는지를 최소한 추정할 수 있어야만 최초의 족보이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문화류씨 『영락보』의 경우는 『성화보』와 「가정보』에 끼친 영향에서 그 실체를 쉽게 추정해 낼 수 있으며 관련 연구 글도 나와 있기에 아쉽게 현존하지 않지만 주저 없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간접적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



과연 문화류씨 선계에 관해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을까. 문화류씨 족보인 『가정보를 보면 대승공을 포함해서 류공권의 아버지 대까지 6대의 기록은 실상 많지 않다. 모두 부인의 기록이 없고, 대승공에게 간략한 공신 기록이, 그리고 효금에게 설화적인 이야기가 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모두 이름 자체와 벼슬명만 기록되어 셈이다. 이것은 『고려사』의 류공권 항목의 간략한 기술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류공권에서부터는 가히 큰 문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의 성씨의 사용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렇게 기록 없음 혹은 부족함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씨가 고려 초기에 다수 나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승공이 역사에 모습을 보인 시기와 상황 등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대승공은 류차달이란 이름, 공신이라는 사실, 대승이라는 벼슬 이름, 그리고 효금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상태로 최소한 『가정보」의 시대, 곧 16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또한 그런 분위기는 『씨족원류』의 시대, 곧 17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前後)로 문화류씨와 차씨와의 관련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단지 류씨 차씨만이 아니라 왕씨까지 포함시키고, 나아가서 지나의 전설상의 존재인 황제(黃帝)까지 등장하는 큰 그림의 이야기였다. 이것을 필자는 황제연원설 혹은 류차동원설이라 불렀다.

여기에 『차원부설원기』가 가세한다. 설원기는 1456년인 세조 2년에 쓰였다고 주장되지만 실제는 1580년경에 위작(僞作)된 것이라 믿어진다. 이것은 설원기가 대개 여러 정황상 정사(正史)와 정반대이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개 가문을 위한 사문서화(私文書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류씨들이 전혀 설원기에 쓰인 내용, 나아가서 황제연원설을 모르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이것만 보아도 설원기는 임진왜란 전 언젠가 그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설원기의 이야기와 류용수의 계보는 사소한 이름들의 차이 같은 것은 있지만 차승색의 부분을 중심으로 실제 일치하고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황제까지 잇는 계보를 조작해 내는 일은 쉽게 이루어졌을 듯하여 류용수의 계보는 설원기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버전일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서, 류용수의 계보를 소개한 류지원의 글에도 권문해가 등장하고 권문해는 그의 작품 『대동운부군옥」에서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황제연원설의 진원지는 바로 『차원부설원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1619년에 쓰였다는 <차식의 신도비명>에서는 박팽년이 지었다는 설원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설원기에서는 나오지 않는 황제(皇帝)를 다루고 있다.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서 황제가 등장하는 것은 류지원의 문헌이 시작이다. (참고로 <차식의 신도비명>은 연안차씨들은 물론이지만 문화류씨들까지 모두 劉씨의 자손으로 만들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설원기의 류차동원설이 근간이 되어 거기에 살이 붙어 황제연원설이 만들어졌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실상 임진왜란 전후에는 『씨족원류』가 반영하듯 차씨 집안은 당시 한미하던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가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는 현재의 형태의 설원기가 그들에게 중요한 자료일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전체 내용이 왕명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 없는 책이다.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설원기에서 류차동원설에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주장들의 근거로서 내세우고 있는 문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문헌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보이지 않으며,문헌들이 주석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점, 어떤 자료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갖고 있어 실제 존재가 의심스러우며 실제 만에 하나 존재했었다 하더라도현재는 물론이지만 설원기의 작성 시기 당시에도 설원기의 주장들을 응원하거나 반박하는데 있어 아무런 사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여기에 더욱 조작된 것이 확실한 차헌기의 「강남보」가 19세기 초에 합세하여 설원기, 류지원, 그리고 차헌기의 내용들이 모여져서 현재의 「원파록」을 구성하고 있다.그 내용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모화사상의 정신 사조와 맞물려서 아주 빠른 속도로퍼져가서 지금은 400여 년의 연륜을 지닌 일종의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되어 버렸다.

문화류씨의 족보에서조차 희미한 선계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공적까지 아들이라는사람의 공적으로 기술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예 아버지를 배제하고 홀로 드러나게까지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역사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임진왜란 전후로 구별하면 편리하다고 생각한다.임진왜란 전에는 아무리 벼슬이 높고 학식이 깊은 류씨라 해도 황제연원설을 듣지도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에는 류씨와 차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큼 확실한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는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의 역사, 아니 조선의 역사에서까지도 철저히 정사와는 다른 주장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동안 류차동원설을 다각도로 고찰하면서 우리 역사의 하나의 비극을 보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마저 들었다. 옛글이라 하여 혹세무민의 요소가 명약관화한데도 아무런 비평 없이 받아들이고 허식(虛飾)과 명분에 매달려 사실이라 믿어버린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거짓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혹시 그들도 누구를 속이려는 마음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풍조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도든다. 세상에 사실이란 자연과학적 사실이 아니고 인간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을 때엔 정형(定形)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는 관점에 따라 사실이 달라질 수도 있고 심지어 반대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이 글은 400년 이상의 역사를 부정하는 글임에 틀림없다. 『차원부설원기』를 무조건 받아들인 사람들과, 서로 연관이 있으며 황제를 직계 선조라 믿어왔던 류씨, 차씨, 왕씨들에게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부족한 사료와 부족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성적으로 필자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필자는 이것이 대승공과 선조 누구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이 결론을 수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더 명확한 사료와 논리가 있다면 언제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독자의 질정(叱正)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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