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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공 묘도비(少尹公 墓道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02 11:58:59       조회수 : 553 파일 :





종부시소윤 류공 휘 한생 묘도비 

(宗簿寺少尹 柳公 諱 漢生 墓道碑)

 

번역문 



금번 비(碑)를 세우고자함에 문헌(文獻)은 오래된 것을 귀히 삼는다는 뜻을 취하여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채록(採錄)하는 바, 이 글은 공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그 동갑 친구인 집현전제학 정공창손(集賢殿提學 鄭公昌孫)이 지은 것으로 그 행적에 대해서 기술함이 자상하고 칭송함이 지극하였다. 때문에 가히준용(準用)하되, 다만 그 자녀의 주(註)에 대해서는 사승(史乘)을 좇아 종직(終戰)을 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어째서 그러냐하면 묘갈명에 기록된 바,
위로 3남은 직함(職銜)이 있고 아래로 3남과 2녀는 모두 어리다고 이른 것은 공께서 일찍이 세상을 버리신 때문이다. 그 후로 그 아들과 사위들이 각기 부(府)와 목(牧)과 군(郡)과 현(縣)의 수령(守令) 으로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니 그 관직명을 쓰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이르겠는가?
삼가 이르건대, 공의 휘(諱)는 한생(漢生)이요 류씨(柳氏)로서 관향은 문화(文化)니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대승공(大丞公) 휘 차달(車達)의 후예이시다.
증조는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휘 보발(甫發)이요﹐ 조는 증정헌대부 참찬문하의정부사 문화군 휘 계조(繼祖)요﹐ 선고는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시호 충경공(忠景公) 휘 량(亮)이며, 선비는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로 공조판서 휘 원발(元發)의 따님인데 조선(朝鮮) 태종(太宗) 임오(壬午 : 一四0二) 정월 二十二일에 공을 한양(漢陽) 본제(本第本家)에서 출생하셨다. 병신(丙申 : 一四一六) 四월 공의 나이 十五세 되던 해에 외간(外艱 : 父親喪)을 당하여 장례를 유감없이 행하고 복(服)을 마치셨다 세종(世宗)이 즉위 하심에 이르러 훈신(勳臣 : 功臣)의 자제로서 승사랑 공신도감승에 제수되고, 이어 감찰 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었더니 경술(庚戌 : 一四三0) 구월에 언사(言事)로 파직되셨다.
갑인(甲寅 : 一四三四) 정월에 내간(內艱 : 母親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병진(丙辰 : 一四三六)에 도관정랑에 발탁되어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옮겼더니 곧바로 조봉대부 제용감부정에 승진하셨다. 신유(辛酉 : 一四四一)에 평안도(平安道)에 오래된 옥사(獄事)를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경차관(敬差官)으로 나가서 득실(得失 : 是非)을 가려 처결하고 이듬해 평안도경력으로 나가셨다. 계해(癸亥 : 一四四三)에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베들고 만기가 차서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으로 옮겼더니 무진(戊辰 :一四四八) 겨을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승진하셨다. 이듬해 기사(己巳 : 一四四九) 三월에 질병으로 자택에서 졸하니 당시 나이 四十八세이셨다. 동년 十二월 十三일 양주(楊州) 동촌 마산리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는데 곧 지금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내동 후록이었다. 공께서 절충장군(折衝將軍)최공 우(崔公 宇)의 따님과 결혼하여 六남二녀를 낳으셨다. 본란(本襴)에 아들과 사위의 관함(官銜)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개서(改書)하니 아들에 맏이 훈(纁)은 천안군수(天安郡守) 요﹐ 다음 륜(綸)은 합천군수(陜川郡守)요, 다음 채(綵)는 성주목사(星州牧使) 요﹐ 다음 작(綽)은 신천군수(信川郡守) 요﹐ 다음 약(約)은 금산군수(錦山郡守) 요﹐ 다음 인(絪)은 생원이며﹐ 따님에 맏이는 부사 변석륜(府使 邊石崙)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찰방 최연령(察訪 崔延齡)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올바르며 분명하고 신중한 한편﹐ 일을 처리함에 민첩하여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훌륭한 명사(名士)로 일컬었고, 관리로서 정사(政事)에 밝아 이르는 곳마다 명성(名聲)을 칭송하였는데 오직 그 수명(壽命)이 길지 못하여 포부를 능히 다 펴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 그러나 아들과 손자들이 능히 아름다운 행업(行業)을 이어 그 가풍(家風)을 지키니 내가 짐짓 그 경사(慶事)의 흐름이 길이 전하여 그치지 않음을 알겠도다.
내가 부끄럽게 인척(姻戚)이 되어 대략 공의 행업을 알고 있는 바, 이제 그 아들 훈(纁)이 와서 문명을 청하니 감히 사양정승의 가문에 아들이 있어, 지조와 품행이 순수하였도다. 사물을 밝게 통달하고, 남에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였도다. 포부를 다 펴지 못했거늘 ` 어찌 오래 살지 못했던가? 하늘의 뜻이 아득하고 멀어, 능히 알지 못하겠도다. 선을 행하여 보답이 있으니, 아들 손자로 징험하겠도다. 무릇 근래에 이르러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풍속을 따르고 형세를 좇아 위선(爲先)과 종사(宗事)가 많았으니 이르되, 아산(牙山)으로 묘를 옮김과, 산소 아래 재실(齋室)을 건립함과 , 만사록(輓詞錄)을 편간함 등이다. 그 후손의 처지에 있어 모름지기 알아야하고 전해야 할 일이라서 뒤에 부기(附記)한다.
아아! 뜻밖에 신도시 확장으로 인하여 지난 계유(癸酉 : 一九九三) 겨울에 공의 묘를 양주로부터 옮겨 아산(牙山)의 배방면 세교리 매봉산 남록 자좌(子坐)의 언덕에 천장(遷葬)하였으니 이곳은 공의 장자 천안공(天安公)의 단소 위로서 합편하고 석의(石儀)를 갖추었는데 산세(山勢)가 통창하고 풍기(風氣)가 유순하여 가히 명당(明堂)이라 이르겠다. 이듬해 공의 묘소에서 우측 아래에 재실(齋室)을 신축, 재숙(齋宿)의 장소로 삼고자 현판을 모선재(慕先齋)라 하였으니 이는 조상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섬돌 아래 좌우로 각각 4간의 와옥(瓦屋)을 지어 포주(庖廚)로 쓰고 제기(祭器)를 갈무리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하고 강목(講睦)을 행하는 장소로 삼고 있으며﹐ 외문 3간이 있어 현판을 경앙문(敬仰門)이라 하였으니 이는 공경하고 우러른다는 뜻이다. 만사록(輓詞錄)은 지난 임신(壬申 : 一九九二)에 부여(扶餘) 종중과 임진(壬辰 : 10一二)에 나주(羅州) 종중에서 전해온 것이 이본(二本)이 있는데 이듬해 계사(癸巳 : 10一三)에 종중의 공의(公議)로서 이 양본(兩本 : 二本)을 절충(折衷) 보완(補完)하고 역해(譯解) 현주(懸註)하여 책으로 편간` 표제를
(少尹柳公輓詞錄』이라 하였다. 이는 공께서 돌아가신 후에 한 조정(朝廷)의 현류(賢類) 三十七인이 그 일찍이 세상을 버리심을 슬퍼하여 각기 지은 율시(律詩) 절구(絶句) 장구(長句)등 도합 四十수인데 모두 슬퍼하며 이르기를 수명이 그 덕과 그 재주에 걸맞지 못했다』고 하였다. 만약 공께서 훌륭한 덕과 도타운 행실이 있지 않았다면 많은 명류(名流)들이 어찌 이같이 슬퍼하고 아까워했겠는가? 이에 가히 그 명성이 공연히 전해진 것이 아님을 알겠도다. 아아! 공께서 세가(世家 : 名閥)의 후손으로서 더욱이 재주로 명망이 있었으니 생각건대 유문(遺文)이 많았을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고 세대가 멀어짐으로써 모두 흩어져 남은 게 없으니 한스럽고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다행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평안도 정주목(平安道 定州牧)의 제영편(題永篇)에 공의 시(詩)한 절구가 실려 있으니 이르되 『아득한 바다에 파도가 잠잠하고 기름진 언덕에 장맛비가 애었도다. 하였다. 이 시가 비록 짧은 글귀이지만 그 후손들의 입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아름드리만한 큰 보옥(寶玉) 보다 훨씬 낳으리라.
끝으로 아뢰고 싶은 말이 있으니 무릇 이 선영(先塋)에 다다르거나 이 재실에 들어온 이는 진퇴읍양(進退揖讓) 곧 나아가고 물러남에 겸손한 태도를 가져 무릇 선조의 유덕(遺德)을 저버리지 않고 후손된 도리를 힘써 마지않아야 할 것이다. 그럴진대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서 『나의 후손이 있도다. 이르시며 마땅히 이곳에 오르내리시리라.
금번 역사에 종회장(宗會長) 우상(思翔)이 여러 후손들의 의논을 좇아 불녕(不佞 : 本人의 謙稱)에게 글을 청하니 돌이켜 보건대 글을 잘하지 못하여 누차 사양하였으나 끝내 저버리지 못하고 우와 같이 서술하니 참람(僭濫)함이 지극하도다.

 

서기 二千十九년 기해(己亥) 청명절(淸明節 : 음三월)에

족후손 대종회상임부회장 종현(宗鉉) 삼가 짓고

십칠대손 희열 삼가 쓰고

문화류씨 충경공파 소윤공종중 삼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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