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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入鄕祖緬奉事實顚末)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6-14 10:24:47       조회수 : 527 파일 :

입향조면봉사실전말(入鄕祖緬奉事實顚末)


                                       1999년발행 여호지 중에서


칠곡 곡전동자좌원(谷田洞子坐原)에 상하분(上下墳)으로 계셨던 입향조 諱 희상(希祥)할아버님과 성주이씨 할머님의 묘를 1991년 신미(辛未) 4월 5일 청명,한식을 기하여 고향인 방천 하촌(下村) 을좌(乙坐)에 합실(合室)로 면봉(緬奉)하면서 새로운 석물로 석의(石儀)를 갖추고 비문은 원래대로 농산장승택찬(農山張升澤撰)을 쓰고 석의비(石儀費)는 14대손 재수(在洙)가 전담 개수(改竪)했다. 이렇게 하기까지는 서로 뜻이 상반되는 분들과 절충 과정 이하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그 전말을 다 밝히기는 어렵고 잡다한 문제들과 이견(異見)들은 대개 생략하고 그 대체적인 것만을 기술한다. 수십 년 전부터 뒷갱변 묘사때는 되풀이하다시피 발의되던 입향조 묘소를 고향으로의 이장 문제를 당시 문중 중견인물들께서 주장해 왔으나 합의하지 못하고 번번히 유보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89년 고향이 대구시 쓰레기 매립장으로 수용 되면서 용산대등록(龍山大嶝麓) 손좌원(巽坐原)에 계시던 증통훈대부군자감정부군(贈通訓大夫軍資監正府君)과 증가선대부한성부좌윤부군(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府君) 및 용산등록(龍山嶝麓)에 계셨던 諱 호남(虎南) 등 조손(祖孫) 삼위(三位)의 묘를 하촌 을좌(乙坐)의 판결사공(判決事公) 諱 기상(起相)묘를 표준하여 향우상위와 향좌하위 및 면봉하여 오심으로서 그동안 종결짖지 못하고 유보되어 오던 입향조 할아버님의 이장 문제가 다시 거론 되었다. 옛날과는 다르게 입향조께서 이장해 오시면 명실상부한 세천지(世阡地)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성숙해졌음으로 이장해 오시기를 묘전회의(墓前會議)에서 다시 발의 되어 모두들 진지하게 토의 했으나 찬반이 엇갈려 속히 마무리 결정짓지 못하고 차차로 시간을 두고 문중 원로분들과 회의를 수차에 걸쳐 거듭했다. 첫째는 윗대 산소를 아무렇게나 옮길 수 없다는 어른들의 관념상의 문제를 많은 의견을 교환하면서 겨우 양해되어 합의하고 보니 또 다음은 둘째로 오실 자리가 문제였으나 여러가지 절충 끝에 위치가 정해지고나니 또 다음은 세째로 비용이 문제라 하셨다. 이장비도 상당히 많을 것인데 석물도 다시 해야하니 그런 거금이 종중에는 없기에 못한다고 했다. 의논 끝에 절충안으로 대종중에서 백만원을 내고 휘 호남 소종중에서 백만원을 내어 비용에 충당키로 하고 석물은 독지가가 나왔다. 그리고 세부에 들어가서 글씨는 누가 쓰기로 하며 독지가의 이름 표기 방법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어른들과 열까지 모든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합의 결정 하고 당일 날 일의 추진 방법까지 논의 합의 했다. 그로부터 몇일 뒤 회의에 참석치 않았던 사람이 위치 결정이 잘못되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합의된 자리는 역장(逆葬)이 되니 안된다고 하면서 산 위로 더 높이 올라가야 된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타당성과 설득력이 없으니 재론치 말기를 종용했다. 이제 낭은 것은 때 맞추어 차질 없이 일 처리만 하면되는데 사전에 각기 할 일을 분담하여 종열과 두열은 석물공장 책임지고 범열은 인부 동원하여 칠곡으로 가고 충열은 당일 현장 책임 맏고 고향 어른들은 총지휘 맏으시기로 추진한 바 모두들 합심하여 마무리 잘 마치고 고유제(告由祭)까지 마쳤다.

그 중간에도 잡다한 말성이 다소 있기는 했으나 다들 잘해보자는 뜻에서 나온 마찰이라 잘 넘어가고 깨끗이 끝났다. 그 후로 4월 8일 인암씨 댁에서 초팔일계 모임에서 또다시 말썽이 나서 시끄러웠다. 그 내용인 즉 입향조 묘비에 비를 세운 독지가의 이름과 대 수가 잘못 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거기에 종열의 이름은 넣어주면서 종손인 인일의 이름은 왜 못넣어 주느냐? 고 비난 발언하는 사람이 있어 한동안 옥신각신 큰소리가 오가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분위기가 매우 삭막했다. 석물은 종재로서 한 것이 아니고 개인 성금으로 했는데 어찌 종손 이름을 넣을 수 있는가? 고 설명을 했으나 분위기가 험악하여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00은 비를 눈으로 확인도 아니하고 옆 사람의 잘못 알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큰소리 치며 00이름도 넣어주면 해롭나? 고 하는가 하면 00는 그 말보다 몇갑절 더 심한 혹평까지도 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오해에서 오는 실언을 일일이 탓할 수도 없어 모든 불쾌감을 자제하면서 자세한 전후사 내용을 설명하고 뒤이어 작업인부 책임자 격인 유열의 보충 설명으로 모두들 수긍하고 조용히 일단락되고 오해가 풀렸다. 수습하고 기상 대부가 임시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진행하여 이장하고 첫 해 묘사 유사로 종열종이 선정되고 벌초 시 합하여 금50만원으로 결정 통과하고 산회하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할아버님의 묘 자리에 관한 것인데 이 자리는 일부는 소종중 소유이고 또 일부는 일열,원열 양 종을 비롯하여 몇사람들 개인 소유 산지인데 할아버님 자리로 조건 없이 선뜻 주셨는데 대종중에서는 이분들의 고마운 정성을 알아야 할 줄 안다. 처음에 얼마라고 금액을 제시하면 땅값을 지불 하겠다고 했으나 땅도 일부분이며 다 같은 할아버님이신데 값은 말하지 말고 대종중에서 다들 알수 있도록 공개하여 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우리 일가 여러분은 이 사실을 잘 아시고 그 고마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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