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보 서문(永樂譜序文)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6-17 12:19:19 조회수 : 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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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보서문(永樂譜序文)
驪湖誌中에서 譯文 拔萃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성함은 좌윤공(左尹公)께서 호랑이의 생명을 구하여 준 음덕 때문이라 하지마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적선한 집에 반드시 여경이 있다 하였는데 그 적선이라 함은 일조일사(一朝一事)를 말함이 아니다. 예로부터 당세(當世)에 현달하여 대명(大名)을 누린이는 많지마는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 가업(家業)을 잃지 않고 수백년이나 오래도록 이른이는 실로 드문데 우리 류씨는 고려초에 일어나 우리 왕조에 이르도록 재상(宰相)의 가통(家統)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오백년의 오랜 세월을 전해 내려오니 과연 이보다 오랜동안 번영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 파별(派別)로 말하건데 대제학(大提學) 관(寬)은 도관찰사(都觀察使) 사눌(思訥)과 함께 문간공에 근원을 같이 하였고 정승(政丞) 량(亮)은 정신공의 현손이요 총제(摠制) 은지(殷之)는 장경공의 증손이다. 그 밖에 동원분파(同原分派)된 자손으로 조정때 벼슬한 분을 다 기록할 수 없고 우리 문화군은 바로 문간공의 5대손인데 영의정 정현(廷顯)으로 전하여 도관찰사 장(章)에 이르기까지 8대를 이어 가풍을 더욱 떨쳤으니 가히 여경이 있다 할 것이다. 어찌 일조(一朝)의 선행으로 이처럼 되었겠는가? 그 연유를 케어보면 시초에 대승공이 재산을 기우려 임금을 도우심과 문간공이 재상으로써 청렴하고 근신하심이 그 시작이며 문정공께서 권신(權臣)을 제거하여 국정을 왕실에로 회복시키고 간곡한 충간으로 왕비의 화를 모면케 하시며 옥에 갇히면서도 직언을 하시어 중국 사신을 부끄럽게 하시고 양민으로서 노예된 자를 알아내어 다시 양민으로 만드시고 금,은의 뇌물을 거절하였으니 무릇 선이란 충(忠)과 직언(直言)과 청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공께서 홀로 이를 겸하시었고 또 정신공의 어버이 섬김에 극진하신 효성과 장경공의 강의(强毅)하심과 문화군의 정직하심 등의 일이 일조의 선행이 아니니 후손들에게 경사가 진실로 이 때문인 것이다. 나는 그런 연유로 특별히 좌윤공의 일몽의 징험(徵驗)만이 아니라고 이르는 바이다. 그 후손된 자는 쌓고쌓은 공덕을 추모하고 생각하여 항상 조심하는 뜻을 가져 선조의 공업을 고찰하여 계술하기를 생각하고 그 절의(節義)를 보고 느끼어 또한 끝까지 욕됨이 없이 해야할 것이다. 이같이 하면 여경이 진실로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금일에 찬술하는 뜻이다. 보이는 세계를 과장했다고 나무라지 말지어다.
永樂21년 (世宗五年癸卯) 1422년 8월
大丞公 14代孫 영(潁) (검한성공파)
註) 가장 오래된 보책이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실전으로 전하지 못하고 오직 본서문(本序文)만 대승공 재실인 경사루(敬思樓)에 보존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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