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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보 서문(文化柳氏 嘉靖譜序文)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6-20 15:26:33       조회수 : 527 파일 :

문화류씨 가정보서문(文化柳氏嘉靖譜序文)

 

                                                                                                     驪湖誌에서拔萃

머리말


사계학자(斯界學者)의 말씀에 의(依)하면 세계각국(世界各國)에서 이미 보학(譜學)을 연구(硏究)하는 학회(學會)가 조직(組織)되고 또 보학(譜學)만을 전문적(專門的)으로 취급(取投)하는 도서관(圖書館)이 있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미국(美國)의 보학학회(譜學學會)는 창립(創立)된지 벌써 90여년(余年)이나 되어 그곳에서 보학(語學)에 관(關)한 국제회의(國際會議)가 개최(開催)되고 있으며 특(特)히 우리 문화류씨족보(文化柳氏族譜)인 가정보(嘉靖譜)가 세계적(世界的)으로 인정(認定)받고 있는 족보(族譜)라고 한다(大宗會門農學博士柳達永 國史編纂委員長文學博士申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族譜)는 영락(永樂)21年 계묘(癸卯)(世宗5年1423年) 8月에 대승공14세(大丞公十四世)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충춘추관편수관겸판사 재감사(充春秋館編修官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 시 량도공(諡 良度公) 휘 영(諱 穎)(檢漢城公派)께서 간행(刊行)한 영락보(永樂譜)가 있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지금은 전(傳)하지 아니하고 다만 동보 서문(同譜 序文)만이 대승공재실(大丞公齋室)인 경사루(敬思樓)에 보존중(保存中)이라고 한다.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보(語)는 안동권씨(安東權氏)네의 성화보(成化譜)이나 여타(他) 보(譜)와 다름없이 손록(孫錄)뿐인데 반(反)하여 가정보(嘉譜)는 손록(孫錄)뿐만 아니라 내외인 척(內外姻戚)까지 등재(登載)함으로써 가위(可謂) 만성보(萬姓譜)라 할 수 있는 국보급(國寶級)이며 세계보학계(世界譜學界)에서 가장 잘된 족보(族譜)라고 인정(認定)되고 있다고 한다. 가정(嘉靖)41年 명종(明宗)17년 임술(壬戌)(1562年) 12月에 음사(蔭仕)로 의흥현감(義興縣監)인 휘 희잠공(諱 希潛公) 충경공5대손(忠景公五代孫)께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좌의정(左議政) 송암공(松菴公) 휘(諱) 관(灌)의 장(長)조카로서 숙부(叔父)에 연좌(連坐)되어 적소(謫所)인 의성(義城)에서 21년간(年間)의 귀양살이 하면서 그 지루함을 달래는 방편(方便)으로 18년간(年間)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전10권(全十卷)의 보(譜)를 완성(完成)하였으니 바로 가정보(嘉靖譜)이다. 총(總) 등재인원(登載人員)은 5만5천(五五千)명에 이르고 우리 문중(門中)의 직계등조록(直系登祖錄)은 제(第)1권(卷)과 6권(卷) 및 10권(卷)이다. 다음에 그 서문(序文)을 옮겨 본다.


 


 

程夫子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須是明譜系然則譜系之明豈不關於祖重木之義 耶盖同原分流人易世睐詠於陶詩情見於親親見於服發於蘇引余於是有感焉歲壬寅冬始修 世譜廣採博訪以著年代尚多漏尋遷聽馬授義興困於叢簿亦未卒事乙已之秋坐門而已 於聞韶詢居蕭索伴愁無物日對譜圖專意証正而羈禁一隅從質問問有往來賓沿牒守宰或相 過為語以及於譜知其為某之後某之孫也則因以求正其系派至於十八年之久問一證二舉五 知十補漏者多而譜己成矣魔吾東柜家大族內外門系無非大承之遠派則子子孫孫顯揚於 朝列者亦莫非大眾之餘蔭也修是證而明是系豈特吾門之幸實朝廷管攝人心之一大本也柳 承旨渾柳參議潛聞是譜之撰欲錢梓印播以壽其傳而柳相智善適尹東都慶州相囑互議謀諸 鄭方伯彦整將欲分刊而遭甲寅之荒亦未遑也余懼夫十年之志終為覆之具而卒未得傅也 手自楷書以成二本一送柳參議以為他日楠梓之地一藏弊以為我子孫之傳也相宗榮是 我從妹婿也觀風南道亦以紙筆求一本余不帽腾寫之勞而操筆益勤者期於廣傳而不至泯沒 也鴨呼蘇老泉云觀吾者孝悌之心可以油然而生思不知看此譜者獨無是心之發也耶


嘉靖四十一年壬戌我明宗十七年十二月下浣請人希潛書于聞寓舍



譯文


정부자(程夫子)가 말씀하기를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포섭하여 종족(宗族)을 수합(收合)하고 풍속(風俗)을 순후(淳厚)하게 하려면 반드시 보계(譜系)를 밝혀야 된다고 하시었다. 그러니 보계(議系)를 밝히는 것이 어찌 조상을 숭상하고 근본(根本)을 소중히하는 의리(義理))와 관계(關係)되지 않겠는가? 같은 근원(根源)에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사람도 바뀌고 세대(世代)도 멀어짐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서 읊은바 있고 정(情)이 친(親)에서 나타나고 친(親)이 보(報)에서 나타남도 소식(蘇軾)의 글에서발표되었다. 내가 이에 느낀바가 있어 임인년(壬寅年,中宗37年1542年) 겨울에 비로소 수보(修譜)를 하고자 널리 묻고찾아 모으며 년대(年代)를 밝혔으나 빠진것이 많았었다. 곧바로 어사(御史)로 옮겼다가 이어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복잡한 업무(業務)에 시달려 일을 끝내지 못하였다. 을사(乙巳,1545年) 가을에 사화(士禍)에 연좌(連坐)되어 문소(聞韶) 의성(義城)으로 유배(流配)된바 귀양살이가 슬슬하여 할 일이 없거늘 날마다 보도(譜圖)를 대하여 정정(訂正)에 뜻을 다하였다. 한곳에 갇히어 있으니 상의(相議)할 사람이 없었는데 때때로 왕래하는 손님과 이임(離任)하는 수령(守令)이 간혹 지나가면 반드시 족보(族譜)이야기를 꺼내서 말하고 그가 누구의 후손임을 알아서 계파(系派)를 올바르게 기록(記錄)하였다. 이렇듯 18년(十八年)의 오랜 세월동안 하나를 물어 둘을 증명하고 다섯을 들추어열을 알아서 빠진것을 많이 보충하여 이에 족보(族譜)를 완성(完成)하였다. 우리나라 거가대족(巨家大族)의 내외계열(內外系列)이 모두 다 대승공(大丞公)의 원파(遠派)로서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정에 드러난 인물(人物)이 많으니 대승공(大丞公)께서 물려주신 음덕(蔭德)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족보(族譜)를 닦아 계통(系通)을 밝히는 것이 어찌 꼭 우리문중(門中)의 다행이라고만 할 것인가? 실로 국가(國家)의 인심(人心)을 포섭하는 대본(大本)이라 할 것이다. 류승지(柳承旨) 혼(渾)과 류참의 잠(柳參議 潛)이 이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한다는 말을 듣고 간행(刊行)하여 오래도록 유전(遺傳)하고자 하던차에 류상(柳相) 지선(智善)이 마침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는지라 상의(相議)하여 정감사 언의(鄭監司 彦懿)에게 말하여 서로 나누어 발간(發刊)하기로 의논이 되었더니 갑인(甲寅,1554年)에 흉년이 들어 끝내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나의 10년(十年)뜻이 마침내 폐기되어 끝내 전(傳)하지 못할까 두려워 친히 2본(二本)을 필사(筆寫)하여 1본(一本)은 류참의(柳參議)에게 보내어 후일(後日)에 발간(發刊)할 자료(資料)로 삼고 1본(一本)은 내집에 소장(所藏)하여 자손(子孫)들에게 전(傳)하게 하였다. 정상(鄭相) 종영(宗榮)은 나의 종매서(從妹嘴)인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와서 지필(紙筆)을 보내어 1본(一本)을 요구(要求)함으로 내가 필사(筆寫)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고 붓을 잡기를 더욱 부지런히 함은 널리 전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다. 아아! 소노천(蘇老泉)이 말하기를 우리족보(族譜)를 보는 이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라 하였으니 내가 알지 못하겠으나, 이 족보(族譜)를 보는 이는 스스로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가정(嘉靖)41년(年)임술(壬戌)명종(明17年,1562年12月)하순(下句)


△ 귀양살이하는 희잠(希潛)(大乘公20世 忠景公6代孫) 좌의정(左議政) 송암공(松菴公) 휘(諱) 관(灌)의 유자(猶子,큰집장조카)문소(聞韶)(義城)우사(宮舍)에서 편저(編著)


註) 정부자(程夫子)......중국송(中國宋)나라때의 대학자(大學者)인 정호(程顥)와 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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